목사인가 장로들인가?
변호와 확증
2008-12-08 , 조회 (66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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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제와 장로제


        성경에서는 누가 목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일인목사에게 인가, 아니면 장로들에게 인가?


        - 이 자료를 만들면서


    성직자 제도 하에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성직자 제도를 부정하고 거기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개신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아니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볼 때 천주교의 교황제도와 독신 성직자 제도(신부 제도)는 분명 잘못된 제도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제도에 매여 있지 않을뿐더러 교황의 권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무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카톨릭 신자들은 도저히 우리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만약 그렇게 하면 당장 하나님이 무슨 벌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그들은 생각하면서 그 즉시 불안과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 빠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신자들에게 아무리 성경 말씀을 통하여 개신교의 성직자의 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어도 쉽게 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잘못된 종교적 습관과 전통을 스스로 깨뜨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바를 분명한 태도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목사님들하고 의논한다고 해서 그들이 정직하게 가르쳐주겠는가? 천주교의 교황제도와 독신 성직자제도의 잘못에 대해 천주교 신자가 그들의 성직자들에게 의논하면 그들이 정직하게 성경에 근거해서 가르쳐 줄 리가 없듯이 말이다. 이러니 답답할 일이다. 모든 기득권자들은 그 권리를 본능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못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결국은 개인이 이 문제를 가지고서 성경 말씀을 수십 번 반복하여 읽는 가운데 그 의미를 확실히 깨달아야 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그 분별된 내용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하며, 그 확신한 바를 삶 속에서 고난을 각오해서라도 실천해 나가는 방법 밖에 없다.


    이 자료를 읽는 모든 자에게 잘못된 전통과 제도의 매임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매임 바 되며 오직 성경말씀에만 매임 바 되는 축복과 자유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1. 성경에는 성직자로서의 목사라는 직위가 존재하는가?


   1) 우리나라의 한글 개역 성경에는 ‘목사’라는 단어가 단 1회 언급되어 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1) 그런데 여기서의 ‘목사’라는 이 말은 헬라어로 ‘포이멘’이라는 말로서 ‘목자’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shepherd(쉐퍼드)라고 하는데, 이 말은 sheep(슆 : 양)이라는 말과 herd(허어드 : 떼)라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따라서 이 단어의 정확한 표현은 ‘양치기’, 또는 ‘목자’이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는 똑같은 이 단어가 모두 다 ‘목자’로 번역되어 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6)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마25:32)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눅2:8)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눅2:15)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눅2:18)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10: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10:12)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2) 따라서 다른 번역 성경에서도 목자로 번역되어 있다.


     ①공동번역 성경과 킹제임스 번역 성경에서는 목자로 되어 있다.

     ②현대인의 성경에는 현대인들의 익숙한 용어를 고려해서 목사로 번역하고 있다.

     ③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서 살펴 본바와 같이 여기서 ‘목사’로 번역된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목자’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와 똑같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글 개역성경이나 현대인의 성경에서마저도 다른 곳에서는 이 단어가 모두 ‘목자’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2) ‘목자’와 ‘목사’는 어떻게 다른가?


    (1) 우리나라의 언어적 표현으로는 ‘목자’라는 말과 ‘목사’라는 말의 차이가 잘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문제삼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의 표현을 가지고서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


    (2) ‘목자’라는 말은 영어로는 pastor(패스터)라는 말로서, ‘양을 치는 사람’, ‘양치기’라는  뜻이다. 따라서 목자라는 말은 양이라는 짐승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양과 함께 동고동락을 함께 하며, 양들을 풍성한 꼴이 있는 곳으로 안전하게 인도하고 지키며 수고하는 소박한 자를 가리킨다. 목자의 옷은 결코 화려하지 않으며, 목자의 일속에서 우리는 권위적이거나 귀족적인 성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특권의식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3) 이에 반하여 ‘목사’라는 말은 reverend(레베런드)라는 말로서 다른 사람과 특별히 구별되는 거룩한 자, 숭상할만한 자, 경외할만한 자, 공경할만한 자, 위엄이 있는 자, 성직자라는 의미가 강하다. 영어 reverend(레베런드)는 revere(리비)라는 단어에 nd가 합쳐진 말인데, revere(리비)라는 말은 ‘경건한 마음으로 숭배하다’, ‘경외하다’, ‘존경하다’라는 의미로서 다분히 계급적이고 권위적이고 특권의식이 강한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다.


    (4) 이러한 연고로 인하여 19세기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도 ‘레베런드(Reverend, 목사)’라는 칭호를 거절하고, 성경에 나오는 용어인 ‘패스터(Pastor,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레베런드’라는 칭호가 카톨릭의 잔재이기 때문에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찰스 스펄젼』, 아놀드 A. 델리모어 지음, 김동진 옮김, 두란노 출판사).


   (5) 이처럼 ‘목자’와 ‘목사’라는 용어는 상이한 성격을 담고 있다. ‘목자’는 단순히 교회를 돌아보는 은사를 지닌 교회 일군을 의미하고 있으며, ‘목사’는 일반 성도들과 신분적으로 구별되는 성직자를 의미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에베소서 4장 11절의 ‘목사(목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1) 이는 전문적인 목자의 은사, 즉 장로들 중에 양무리를 돌아보며, 양을 먹이고, 양들을 격려하며 악한 자들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은사(재능)를 가진 자들을 말한다. 장로들 중에는 이와 같이 목자로서의 은사를 가진 자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전도자(복음 전도자)로서의 은사를 가진 자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교사(말씀을 쉽고 조화롭게 잘 가르치는 자)로서의 은사를 가진 자도 있다. 물론 집사들 중에 전도자와 교사의 은사를 가진 자도 있을 수 있다(행21:8).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의 목자는 이러한 은사로서의 목자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계급적 지위로서의 목자, 다시 말해서 성직자로서의 목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2) 만약에 여기에 나오는 ‘목사’라는 단어가 단순히 이러한 은사가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교회 안에서의 어떤 직위였다면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전도자’라는 직위와 ‘교사’라는 직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교회 안에는 전도를 전문적으로 하는 전도자는 있을지라도 ‘전도자’라는 직위는 없으며, 전문적으로 말씀을 잘 가르치는 교사는 있을 지라도 ‘교사’라는 직위는 없다. 물론 교단에 따라서는 ‘전도사’와 ‘강도사’가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목사가 되기 이전 단계의 직위일 뿐이며, 목사에게 예속된 직위일 뿐이지 목사와 대등한 가운데서 고유한 영역을 담당하는 전도자와 교사는 없다. 노파심에서 언급하고 넘어가건만 여기서 말하는 교사는 흔히들 장로교 안에서 볼 수 있는 주일학교 어린이 교사(반사), 중고등부 교사(반사)는 더더욱 아니다. 전문적으로 어른들이나 학생들, 그리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교사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3) 여기에 나오는 것들이 직위가 아니라 은사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중복하여 이것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①베드로는 사도이면서도 장로였다(벧전5:1).

     ②요한도 사도이면서 장로였다(요이1:1, 요삼1:11).

     ③바울은 사도이면서 교사였다(딤후1:11).

     ④빌립은 집사이면서 전도자였다(행21:9).

     ⑤성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바울, 베드로, 요한 등은 사도이면서도 전도자였으며, 교사였다. 또한 장로였고 목회자였다.

     ⑥만약에 이러한 것들이 은사가 아니라 직위였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게 이들을 불러야 하겠는가? 어떤 한 사람을 향하여 ‘사도님’, ‘장로님’, ‘목사님’, ‘교사(선생)님’, ‘전도자(전도사)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겠는가?


    (4) 또한 여기서 나오는 것들이 직위가 아니고 단순히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에 그 순서에 있어서도 전도자, 목사, 교사 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직위였다면 그 직위의 높고 낮음과 중요성으로 볼 때 그 순서가 목사, 전도사, 교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아예 오늘날 장로교의 교회 계급 서열처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목사로, 혹은 장로로, 혹은 권사로, 혹은 안수집사로, 혹은 서리 집사로 주셨으니”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4)고린도전서 12장 28절 말씀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1) 여기에서는 아예 ‘목자(목사)’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다만 ‘사도’, ‘선지자’ 다음에 ‘교사’가 언급되어 있다. 왜 목사직이 빠져 있을까? 그 이유는 초대교회 때에는 양들을 다스리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은사를 지니고서 활동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서 일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2) 이어서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방언을 말하는 자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도 은사로 보아야하는 것이지 이것을 직함(직분)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능력자’, ‘병 치유 은사 소유자’, ‘돕는 자’, ‘다스리는 자(통치자)’, ‘방언자’라는 직분을 가진 자가 결코 없지 않는가?


    (3) ‘목사(목자)’라는 말은 아예 없고 다만 ‘다스리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며, 이것마저도 거의 맨 뒷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는 오늘날과 같은 성직자 개념으로서의 목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은사의 한 영역으로 목회가 존재했던 것이다.


    (4) 따라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한 영역이라고 그 뒷 구절들(고전12:29-31)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5)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초대교회에는 오늘날과 같은 ‘목사’라는 성직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장로들이 ‘목자’의 은사를 가지고서 그러한 일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왜 성경에는 장로(감독)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는 직접 자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어도(딤전3:1-13, 딛1:5-9) 목사의 자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되어 있지 않는가?


   1) 만약 초대교회에도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가 있었다면 목사의 자격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가 그 때에는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2) 오늘날과 같이 교회 안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는 목사에 대해 아무런 자격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3) 그 당시에는 신학교도 없었을 것이며, 목사고시도 없었을 텐데 서로 목사를 하려고 교회가 난리였을 것이며, 이러한 혼란을 방치할 수 없기에 당연히 목사의 자격에 대해 성경에 엄격하게 언급했을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교회가 세워진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 목사의 자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을뿐더러 아예 ‘목사’라는 단어조차도 없다. 우리나라의 『한글개역성경』이나 『현대인의 성경』에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딱 한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현실성을 반영한 번역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동일한 이 단어가 모두 ‘목자’로 번역되었음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 만약에 카톨릭 교회가 ‘신부님’으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독신 성직자 제도를 결코 초대교회의 것으로 또는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5) 신약교회(초대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교회와 관련하여 기록된 성경 말씀 중 ‘목자’라는 단어는 총 6번 밖에 사용되고 있지 않다. 교회가 처음 형성되어진 과정부터 점차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세워진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에는 ‘목자’라는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어지고 있지 않다. 오직 서신서에 5번, 계시록에 1번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11절은 교회 안에 성도들을 돌아보는 은사로서의 목자를 말씀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13장 20절, 베드로전서 2장 25절, 5장 4절, 계시록 7장 17절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고, 유다서 1장 12절은 이단자인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키면서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표현되어 있다.

  만약 초대교회에도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가 있었다면 사도행전에 최소한 몇 번은 목사라는 호칭이 등장했었을 것이며, 특히 각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는 당연히 매번 목사라는 호칭이 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생각에는 목사 없는 교회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편지에 그 교회의 목사에 대해 아무런 인사말이나 당부의 내용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과 그 많은 서신서에 일절 목사라는 호칭이 등장하고 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6) 이 모든 의문점들을 풀 수 있는 해답은, 그 당시의 교회 안에는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고, 양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며 목회를 했기 때문이다.

 

3. 성경에는 장로에 대한 언급은 수 없이 많으며, 그 자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으며, 장로들이 교회를 돌아보고, 다스리며 목회했다고 성경은 수 없이 증거하고 있다.


    1) 바나바와 사울(바울)은 구제헌금을 유대의 가난한 교회(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었다.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30)


    왜 구제헌금을 목사에게 보내지 않았을까? 목사 밑에 있는 장로들이 재정을 담당해서 장로들에게 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장로들이 실제로 교회를 다스리고 교회를 인도하며 목회를 하고 있었기에 장로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했던 것이다. 교회 안에 목사라는 별도의 성직자 계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로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한 것이다. 만약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가 있었다면 당연히 목사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는 목사가 교회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교리적인 문제가 있었을 때 12사도들과 함께 의논했다(행15장).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행15:2, 4, 6, 22-23)


     왜 이 중요한 회의에 목사가 빠졌을까? 이 해답은 그 당시에는 교회에 목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 규모가 작고 재정이 부족해서 목사를 모실만한 여유가 없어서 목사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아직 신학교가 설립이 되지 않아 목사를 배출해내지 못해서 목사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애당초 초대교회 안에는 목사라는 성직자가 없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애당초 성경에도 없는 독신 신부제도, 교황제도를 만들었고, 개신교는 이것을 모방하여 목사라는 성직자 계급을 만들었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에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가 있었다면 왜 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 목사가 빠졌겠는가? 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오늘날과 같은 목사라는 성직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돌아보고, 다스리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목회활동을 누가 했겠는가? 장로들이 이 일을 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12사도들은 장로들과 함께 교리적인 문제를 의논했던 것이다.


   3) 바울과 베드로 사도는 교회 장로들에게 직접적으로 지역교회를 돌아보고 감독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장로들은 성령님께서 교회를 감독하도록 세운 사람들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17, 28)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5:1-2)


     바울은 왜 에베소 교회의 목사를 부르지 않고 장로들을 불러 그들에게 목회자의 사명을 일깨워주었을까? 또한 베드로는 왜 목회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소아시아의 다섯 지방(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교회의 목사들에게 말하지 않고 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했을까? 만약에 교회 안에 오늘날처럼 목사라는 별도의 신분이 존재했다면 당연히 목사에게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성직자로서의 목사제도가 아예 없었다. 다만 장로들이 서로 그 역할을 분담하여 목회 활동을 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장로들이 이와 같은 목회 활동을 하도록 교회의 감독자로 삼은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목사를 교회의 감독자로 삼았다는 말은 없다. 장로들이 교회를 감독하고 목회하는 일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를 그 어떤 인간의 제도로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장로라는 직분과 감독이라는 직분은 서로 다른 직분이 아니라 동일한 직분을 두 가지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이다. 감독이란, 교회를 감독하는 일을 한다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장로는 그 나이와 신앙 경륜이 깊다라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잘못된 어떤 이들처럼, 감독은 장로 위에 있는 어떤 성직자 계급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감독이 장로 위에 있는 어떤 성직자 계급이라면 바울은 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불러 모아놓고, 성령이 그들을 교회의 감독자로 삼았다고 말했겠는가?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이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모아놓고, 성령이 그들을 교회의 감독자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성경은 더베와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교회(행14:23), 에베소 교회(행20:17), 빌립보 교회(빌1:1), 그리고 그레데 섬의 교회들(딛1:5)이 복수 장로에 의해 감독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베드로에 의하면 본도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그리고 비두니아 교회들도(벧전1:1) 복수 장로에 의하여 감독되었음을 볼 수 있다(벧전5:1).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행14:23)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행20:17)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벧전1:1, 5:1)


    왜 이들 교회들을 언급할 때 장로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자주 언급이 되면서도 목사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이 없을까? 이는 신약교회에는 목사가 아예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 목사를 찾는 것은 개신교에서 교황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독신 신부제도와 교황제도를 너무나도 당연시하고 있으나 개신교에서는 독신 신부제도나 교황제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듯이 개신교 교회에서는 성직자 제도인 목사제도를 너무나도 당연시하고 있으나 초대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교회가 장로들에 의해서 직접 감독되어졌음을 분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 목사제도가 초대교회 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초대교회 때에는 여러 명의 장로들에 의해서 그 역할이 분담하여 교회가 다스려지고 인도되어졌다.


    5) 사역의 초기와 말년에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도록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디도서 1장 5절에 의하면 바울은 자격있는 장로들의 교회를 돌아보기 전에는 확고하게 세워진 교회로 보지 않았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행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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