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곳과 깊은곳이 서로 부름


십자가체험 2011-03-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7101.html

 

깊은곳과 깊은곳이 서로 부름

 

 

『주의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시 42:7).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막 4:5-6).

『그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로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39:1-6).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1-4).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흔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 하더라』(행 5;1-5).


시편 42편 7절의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는 말은 「깊은 곳과 깊은 곳이 서로 부른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깊은 곳은 오직 깊은 곳의 외침으로 인하여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얕은 것은 결코 깊은 것을 만질 수 없고 외면적인 것은 결코 내면적인 것을 만질 수도 없다. 깊은 곳은 오직 깊은 곳과 서로 부를 따름이다.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깊은 곳을 만질 수 없다. 당신의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깊은 곳을 만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깊은 곳은 오직 당신의 깊은 곳과 반향(反響)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당신이 어떤 지방에 가서 말씀을 들을 때 당신이 가장 깊이 만지는 것은 사람의 깊은 속에서 나온 것 뿐이다. 만약 어떤 것이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받은 도움은 얕은 것에 불과하고 이면적(裏面的)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곳의 중요성을 보아야 한다.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은 결코 깊은 곳에 이르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깊은 곳으로부터 유익과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당신의 깊은 속에서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영적인 일에서 남을 도우려면 반드시 무언가가 깊은 속에서 나와야 한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깊은 곳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만약 당신의 말씨가 깊은 속에서 나온것이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이상(理想)을 얻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즐겁게 하고 일시적으로 흥분케 할 수 있더라도 사람의 깊은 곳을 만질 수는 없다. 오직 깊은 곳만이 깊은 곳을 부른다. 얄팍한 말씨는 결코 남의 깊은 곳을 만질 수 없다.

깊은 속에 있는 뿌리

 

말씀을 전하거나 들을 때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주 예수님이 말한 씨 뿌리는 비유 안에 들어 있다.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 가에,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밭에 뿌려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받는 사람의 네 종류의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

이러한 여러 가지 다른 상황에서 주 예수님은 흙이 얕은 돌밭, 곧 위에는 흙이고 아래는 돌인 밭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밭에 뿌려 진 씨는 매우 빨리 자라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즉시 말라 버린다. 뿌리란 무엇인가? 뿌리는 밑으로 자라는 것이다. 잎이란 무엇인가? 잎은 땅 위에서 자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보이지 않는 생명을 뿌리라 하고 보이는 생명을 잎이라 말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보이는 생명은 있으나 보이지 않는 생명이 매우 결핍된 데 있다. 바꿔 말해서, 감추인 깊은 속의 생활이 부족함을 말한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 중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생명의 부분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밖의 좋은 행위를 주의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밖의 좋은 행위 외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얼마나 되는가?

만약 당신의 모든 영적 체험을 다른 사람이 다 알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뿌리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미덕을 사람 앞에 다 보이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떠한 것이 밑에 있는가? 만약 당신의 모든 체험이 드러나고 나타난 것이라면 당신의 모든 것은 위로 자란 것이지, 밑으로 뿌리박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잎만 있고 뿌리가 없는 흙이 얕은 사람이다.

영적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한면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몸의 생명이 있어야 함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또 한면으로 지체인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분량이 매우 개인적인 것임을 보아야 한다. 이 점은 나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이며, 마땅히 지켜야 할 부분이다. 만약 이 부분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의 지체로서의 특징을 잃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 특별한 용도가 없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주신 당신의 특징을 드러내고 나타내려 할 때, 당신은 곧 메마르게 된다.

주 예수님이 산 위에서 가르치신 것은 매우 특별하다. 주님은 한면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시며 공개적인 것임을 말씀하시고, 또 한면으로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한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고 기도할 때에 은밀한 가운데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한면으로는, 은밀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공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감추어져야 하고, 나타나서는 안 될 많은 미덕들이 있어야 한다. 깊은 속에 감추인 것이 없이 사람 앞에 나타난 것만 있는 사람은 연단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 여러 해 된 우리 자신에게 다른 사람이 모르는 체험이 얼마나 되며 다른 사람이 아는 것 외에 내게 남아 있는 체험이 얼마나 되는가를 우리의 눈이 열려서 볼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기를 간구 해야 한다.

깊은 곳의 체험

 

바울은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말한다. 바울이 고린도 후서 12장을 쓴 것은 자신에게는 무익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한 것이다. 바울이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한 것은 부득불 말한 것이다. 형제 자매여,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를 조금 받을 때 나팔을 불어 즉시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면 자신에게 유익된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말했는가? 그것은 바울이 사도인 것을 의심하고 기독교의 기초에 대해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불 말한 것이다.

바울은 모든 계시를 사람에게 말해 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이 사람은 바울 그 자신이다)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말했다.

십사 년 전의 체험을 이제야 말한 것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칠 년 동안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바울은 십사 년 동안이나 감추어 두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십사 년 동안 바울의 이러한 체험을 알지 못했다. 십사 년 동안 사도들은 바울의 이러한 체험을 알지 못했다. 바울은 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십사 년 전에 체험한 것, 곧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을 우리에게 말해주면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라고 말하고 그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라고 말했다. 이제까지도 그러한 체험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뿌리로 남아있다.

형제 자매들이여, 뿌리는 중요한 것이다. 당신에게 바울의 사역이 있으려면 먼저 바울의 뿌리를 얻어야 하고, 바울의 생활을 가지려면 먼저 바울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바울의 밖의 능력을 가지려면 바울의 내적인 체험을 가져야 한다. 오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영적인 것들과 특별한 체험이 보존되지 않는 데 있다. 조그마한 체험만 있어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생활에서 감추인 부분이 없고 모두 사람 앞에 생활하는 것이 바로 뿌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깊은 곳에 이끌리기 위하여 바울의 체험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얕은 생활

 

이사야 39장은,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들고 그 글과 선물을 보낸 것을 말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보전하지 못했다.

성경의 기록은 「히스기야가 사자로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화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라고 말한다. 히스기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병이 나았을 때 하나님에게서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나게』(사 38:8)한 징조를 받고 치료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고 자랑했다.

히스기야가 사람에게 궁중 보물을 보인 것은 그가 십자가의 다룸을 받지 않았고 천연적인 생명이 다룸 받지 않은 것을 말해준다. 히스기야의 뿌리가 밖으로 드러났음을 밝히 볼 수 있다. 히스기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바벨론 사람도 알았고, 히스기야에게 있는 것을 바벨론 사람은 알았다. 히스기야에게는 뿌리, 곧 보이지 아니하는 생명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했다. 이것은 남에게 보인만큼 자신은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당신의 생명이 사람 안에 진설(陳設)된 만큼 당신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숙한 일이다.

오! 자기의 체험을 말하지 않기를 참지 못하고 한번 말하면 통쾌하게 말하려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궁중 보물을 사람들에게 보인 것과 같다. 어떤 형제는, 「많은 형제들이 병들었다가 나은 후에 간증을 할 수 있었읍니다. 나도 죽음에는 이르지 않는 병을 앓다가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받는다면 다음 간증 집회에서 할 말이 있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형제는 무엇 때문에 고침을 얻으려고 했는가? 간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체험을 추구한 것은 자기가 할 말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다. 오! 이렇게 얕은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보게 하며,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

간증을 하되 자신을 드러내지 말것

 

그렇다면 우리는 간증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바울도 간증을 했고, 역대로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간증을 했다. 우리도 마땅히 간중을 해야 한다.

그러나 간증하는 것과 자기의 체험을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간증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말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간증을 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부득불 말하는 것이지 식사 후에 차 마시며 한담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많은 경우, 한담하는 말이 영적인 보배를 잃게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에는 마땅히 간증을 해야한다. 그러나 당신이 간증을 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방면에서 도움을 받게 해야 한다.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바울도 간증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임의로 말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십사 년 전의 일을 계속 감추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십사 년 전의 체험을 말할 때에도 그들에게 모든 것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십사 년 전의 일을 언급했을 뿐 그들에게 과정을 말해주지 않았고 단지 계시를 얻었다는 것과 은밀한 말을 들었다고 말했을 뿐 어떤 말을 들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삼층천은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의 보물은 무엇이며 우리의 은금과 향료와 모든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는 금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은은 십자가의 구속에서 나온 것이며 향료는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음으로 흘러나온 것임을 알아야 하고, 왕국에 관한 모든 것이 보물이며, 하나님과 주님으로부터 얻은 주님의 모든 역사가 우리의 무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교리나 성경의 가르침이나 신학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통에서 얻은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왕래하고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음으로 얻은 것들을 임의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간증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많은 영적인 체험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영적인 체험들이 감추어질 필요가 있고 나타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도 간증을 하셨지만 그분은 말을 많이 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간증하는 것과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분은 병자를 치료한 후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특별히 마가복음에서는 한번뿐 아니라 여러 번 분부한 것을 볼 수 있다. 한 번은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막 5:19)고 분부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간증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일을 뉴스처럼 남에게 말한다면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뿌리가 없다고 한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은밀한 가운데의 보물이나 생명의 체험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많은 체험을 보류해 두어야 한다. 만약 보류해 두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람 앞에 보물을 놓으면 노략당하여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메마름은 드러남과 함께한다. 당신은 간증을 하더라도 바울처럼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해야한다. 사탄의 공격은 특별히 사람이 나타날 때 다가온다. 모든 나타남은 우리로 하여금 손실을 받게 한다. 병이 치료된 사람 중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간증한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간증한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다시 병이 들게 된다.

어떤 사람이 간증한 후에 같은 방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뿌리가 덮힌 사람을 보호하며 뿌리가 나타난 사람은 보호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간증을 하라고 하시면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것을 마땅히 감추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추인 그것을 보호하시며, 또한 그것은 당신의 누림이 된다.

우리의 봉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지만 그러한 일을 다른 사람이 듣도록 선전하는 재료로 삼아서는 안 된다. 당신이 그것을 나타낼 때 당신의 봉사에서 즉시 사망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나타낸 만큼 잃게 된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를 계수했을 때 사망이 들어왔다(삼하 24),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드러냄으로부터 구원받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추인 모든 것을 가지고 나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움직이셔야 우리가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형제에게 말을 하라고 하셨을 때 그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만약 억누른다면 지체의 율(律)을 위배하는 것이다.

지체에게는 교통하는 율이 있다. 당신이 그 율을 억누르면 통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소극적이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생명을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일만을 말하여 말이 많고 나타나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공격을 받게 한다.

우리는 한면으로 몸을 알고 몸의 흐름을 알아야 하고, 또 한면으로는 주님 앞에서 남이 모르는 많은 체험, 곧 우리의 감추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 모든 뿌리는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깊은 속을 향하고 밑으로 뿌리를 박는다면 결국 당신은 깊은 곳과 깊은 곳의 서로 부름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 속에 깊은 것이 있을 때 사람의 깊은 곳이 만진 바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 속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다른 사람도 도움을 얻게 되고 빛을 받게 될 것이며 그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깊은 곳은 깊은 곳을 만지며 서로 부른다. 당신에게 깊은 곳이 없다면 당신은 단지 표면적인 봉사로 사람의 외면적인 감동을 얻을 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오직 깊은 곳만이 깊은 곳을 부른다.


워치만 니
[열두 광주리 가득히 1, "깊은 곳과 깊은 곳이 서로 부름", 한국복음서원]



흑암의 밤과 부활의 아침


십자가체험 2011-03-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7100.html
 
흑암의 밤과 부활의 아침
 

 

우리는 혼과 혼의 천연적인 능력과 재능과 지혜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우리를 계속 따라 다닌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생토록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이다.

우리는 영원히 이것을 넘어설 수 없다.

십자가를 피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고 말씀하신다.

혼을 잃고 생명의 영이 일어나게 하려면 반드시 죽음과 부활을우리 생활의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야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필히 우리를 어떤 지점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고통과 흑암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을 만지고 근본적인 것을

박탈하시며 결국 우리가 자신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이런 경지로 이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고되고 고통스런

길을 걷도록 엄하게 대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기를 '좋아하지'않게 되고

심지어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게된다.

그러나 바로 이때 비로서 그분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시작한다.

 

.. 이 일이 당신 안에서 참되게 세워질 때 당신은 이미 새로운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의 경지'라고 부르겠다.

사망의 원칙은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안에서 어떤 위기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활 안으로 해방하셨음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잃은 것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비록 이것이 전에 얻은 것과

다를지라도- 발견할 것이다. 이제는 생명의 원칙이 당신안에 역사하여

당신에게 권능과 힘이 있게하고 생기와 생명도 있게 한다.

그때부터 당신은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찾게 된다.

다른점은 모든 것이 하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혼을 우리 생명의 근원으로 취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혼을 사용하지만 더 이상 혼안에 살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취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취하지 않는다.

우리가 몸을 생명 삼을 때 우리는 짐승과 같이 살게 되고

우리가 혼을 생명 삼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도망한 반역자와 같을 것이다.

그 반대로 우리가 영안에서 살고 영으로 말미암아 살 때, 비록 우리가 몸의

각 부분을 사용하는 것같이 우리 혼을 사용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영의 종이 된다.

 

... 그러나 바로 이 흑암의 밤이 항상 많은 사람에게 어려움이 된다.

지난 날들 동안, 주님은 그분의 은혜 가운데서 나를 수개월간 한쪽에

제쳐놓으시고 영적인 면에서 완전한 흑암안에 들어가게 하신 적이 있다.

나는 그분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았다.

거의 모든 것이 정지되었고 모든 것이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나중에 그분은 내가 잃었던 것을 점차적으로 회복해 주셨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잃었던 것을 스스로 되찾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성소 안에서 긴 밤 -흑암속에

있는 온 밤-을 거쳐야 함을 기억하라. 조급해 하는 것은 무익하다.

주님은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를 아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쪽에 제쳐놓으신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도 못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긴 시간을

사용하시는지를 알려 줄 수 없지만 원칙상 그분이 일정 기간 동안 당신을

거기에 머물게 하신다는 것은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어떤 발전도 없고 당신이 귀히 여기는 것들도 당신의 통제

밖에 있게 된다. 당신은 문이 없는 담을 대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께 쓰임을 받고 주님의 축복하심도 있는데 당신만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흑암속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룻밤뿐임을 기억하라

비록 온 밤일지라도 하룻밤뿐이다.

어두운 밤이 지나갈 때 당신은 당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영광의 부활안에서 다시 돌려 받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부활안에서 얻은 것이

과거 소유했던 낡은 것과 어떻게 다른지 당신은 측량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이미 주님을 만나 철저히 만져진 바 됨으로써

천연적인 능력을 잃는 것을 안다면 정말 복된 일입니다.'

나는 전병 하나를 들고서 그것을 먹으려는 것처럼 그것을반을 쪼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 쪼개진 두 조각을 하나로 합쳐 놓았다.

내가 말하기를, ' 이 전병은 겉보기에는 다른것과 다를게 없지만

사실은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당신의 등뼈가 부러지면 하나님이 가볍게 만지기만 하여도

당신은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283-290 요약>

 



죽이는 빛 비춤


십자가체험 2011-03-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7099.html
 
죽이는 빛 비춤 - 워치만 니 영적판정
 

 

  우리가 사지로 인도되기 위해서는 빛 비춤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강한 빛 비춤을 얻기 전이라면 반드시 강한 빛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원래 연약하지만 일단 빛이 비추이면 우리의 연약함을 더욱 증가시키며 극도로 연약하여 사지로 이끌린다. 우리는 마치 문둥병 환자처럼 증세가 심할수록 좋다. 온 몸에 퍼지게 되면 정결케 되는 것과 같다. 강한 빛비춤은 바로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우리를 비춘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죽음을 거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부활이 있을 수 있는가 죽음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부활이 없다. 그러므로 죽음 이전의 은혜는 다 우리를 부활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생명, 은사, 사역 등은 다 죽음 이후에 시작된다. 진실한 빛 비춤은 사망에 이를 때까지 당신을 계속 비춘다. 지금은 생명, 능력, 부활, 새창조를 구하는 때가 아니다. 지금은 강한 빛을 철저히 비추시도록 구하는 시기이다.

 

  당신이 연약함 안에 있다면 즉시 능력을 구하지 말라. 죽음에는 능력이 필요 없다.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없고 죽음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부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 이 길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연약함을 만날 때 능력을 추구하지 말고 빛 비춤을 추구하라. 타락을 만날 때 생명이 증가되기를 구하지 말고 더욱 강한 빛을 추구해야 한다. 당신은 주님께, '주여 나에게 더욱 많은 빛, 더욱 큰 빛, 더욱 강하고 더욱 철저한 빛 비췸을 주소서'라고 말해야한다.

 

  사람의 천연적인 잘못은 바로 자신의 무용함을 보고서 유용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용함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부활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한 것 같다. 자살하는 사람은 바로 그의 마지막 걸음이 죽음에 도달했을 때 지나가지 못한 것이다.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부활로 간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을 얻기 위해 죽음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가지고 부활을 얻으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단지 자신을 빛 비춤 아래 두고 주님께, '나는 능력이나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빛 비췸을 구합니다'라고 말하라

 

  한가지 매우 신기한 것은 바로 수많은 사람이 늘 죽기 전에 부활하기를 사모하는 것이다. 빛 비췸이 그에게 철저하게 비추지도 않았는데 그는 회복되고자 하고 부활하려 한다. 다시 말한다면, 먼저 죽음이 있기 전에 부활이나 능력을 구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긍휼과 빛비추심을 구하라나는 것이다. 완전히 땅에 엎드러질 때까지 주님으로 빛 비추시게 해야 한다.

 

  부활에 있어서 제발 너무 쉽게 도움을 받으려 하지 말라. 죽기 전에 부활을 구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이다. 주님은 당신을 밑으로 내려가게 하시지 위로 올라가라고 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아직 강한 빛 비췸과 최후의 빛 비췸을 얻기 전까지, 다시 넘어질 수 없을 정도가 되기 전에 부활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유용하여 대표 권위가 되기를 바란다면 더욱 많은 빛 비췸이 필요하다. 이럴 때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과 타락함을 보고 갈수록 죽음에 근접하므로 갈수록 부활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커다란 빛 비췸 전의 받은 은혜는 부활을 지체 시키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니의 기본적인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처럼 자신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 비추심을 통하여 우리를 드러내시고 우리는 빛 비췸을 통해 자신을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기를 원한다.(영적인 판정과 판정의 실례100-102쪽, 워치만 니)



매맞음을 거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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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맞음을 거친 영 - 워치만 니의 판정의 실례

 

 

  그리스도인의 길은 단지 사상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영이 깨끗케 되는 것이다. 하나의 비유를 쓰도록 하자.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를 맞은 개구쟁이는 처음에 아버지가 너무 엄하다고 느끼지만후에 아버지에게 사랑이 있으며 자신에게 정말 잘못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마땅히 매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감정은 아버지가 사랑으로 인해 그를 때렸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느낌은 단지 감정과 생각에서의 열매를 가져왔을 뿐 매맞음을 거친 영은 아직 산출되지 않은 것이다.

 

  만일 매맞음을 거친 영이 산출되면 그 아이는 금방 그 며칠 동안을 조심할 것이다. 식탁에서 젓가락이나 그릇을 움직일 때도 소리가 없으며, 개구쟁이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침실에서도 떠들지 않고 행동이 조용해질 것이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으 매맞음을 거친 영이 그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혹은 그에게 십자가의 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역사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감정이 이전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 우리영에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방금 매맞음을 거친 영을 가지게 하여 마치 매맞을 때의 고통과 수치스러움과 두려움이 지나가지 않는 것과같이 된다. 무릇 십자가의 다루심을 받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흔적은 바로 방금 매맞음을 거친 영으로 날마다 그에게 남아 있다.

 

  그는 다시는 함부로 하지 않고, 다시는 희희낙락하는 얼굴이 아니다. 상처를 받은 것과 같을 것이며 오직 이럴 때만이 생명을 흘러 보낼 수 있다. 우리가 매번 다루심을 받는 것은 다 매맞음을 거친 영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조금 전에 말한 아이가 다음에 다시 그의 영이 교만하고 느슨해질 때는 다시 아버지에게 매맞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번 하나님께 매를 맞을 때마다 우리의 영이 깨끗해지도록 매맞음을 거친 영을 산출해야한다. 이것은 아버지와 말하지 않는다거나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사람에게 있는 장난스러움과 느슨함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상태는 미숙한 것의 표현이며 사람의 원래의 상태이다. 이런 것들은 불을 거쳐야 익을 수 있다. 매맞음을 거친 영은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영의 표시를 갖는다. 단지 태도, 언어, 감정, 생각에서 바뀔뿐 아니라 날마다의 생활에서 영 안에 매맞음을 거친 상태가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매맞음을 거친 영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를 접할 때 즉시 알게 된다.

 

  십자가의 흔적이 없는 사람을 볼 때 곧 알 수 있으며 이것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고난과 매맞음을 만나고도 만일 매맞음을 거친 영의 나타남이 없다면, 이것은 아주 애석한 일이다. 하나님이 매번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방금 매맞음을 거친 영의 효과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며 영적인 길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도마에게 그분의 손에 있는 못박힌 흔적과 옆구리에 있는 창의 흔적을 만져 보도록 하셨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상처 또한 마땅히 분명한 흔적이 있어야 미숙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매맞음을 거친 영 안에 살고 있다. 이런 영이 있는 사람은 감히 함부로 움직이거나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것이며 다시는 거치른 사람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 나는 당신의 영이 너무 자유스럽다고 느끼며 마땅히 당신의 영에 십자가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당신이 말할때나 기도할 때 십자가의 흔적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 느슨한 영은 아직 미숙한 것이며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다.

 

  모든 고목나무는 칼로 베어지지 않으면 고무를 흘러 보낼 수 없다. 사람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깊은 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 미숙한 사람은 사역에 분깃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성숙케된 사람만이 사람을 생명의 실제 안으로 인도할 수 있다. 매번 만나는 시련과 고난등은 항상 풍성한 열매를 산출해야 한다. 이것은 큰 이링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별로 유용하지 못한 것이다.

 

 



십자가의 표시와 십자가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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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표시와 십자가의 흔적 - 워치만 니의 판정의 실례
 
 
형제의 생각은 강한 영보다 더욱 강하다. 당신은 반드시 당신의 총명과 민첩함등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주께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강한 생각과 민첩함은 당신에게 영적인 어려움이 될 것이다. 나는 총명하고 민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총명과 민첩함에 십자가의 표시와 상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처가 우리의 길이다. 바울은 총명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그의 총명함을 만지지 못하고 그 사람을 만진다. 우리가 그의 총명을 만질때 십자가의 상처도 만지게 된다. 그와같은 사람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쉽게 말을 듣고 쉽게 자신의 뜻을 변경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길을 알기 때문에 그는 두렵고 떠는 사람이 되었다. 겉사람은 반드시 파쇄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용이 없는 사람이 된다.
 
 
한 형제가 그가 얼마나 장난스러우며 어떻게 선생님을 희롱했는가 등을 간증했다. 그가 매번 이 일을 말할 때마다 이것이 옳지 않다고 정죄하면서 말한다. 그러나 내가 들을 때에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간증한다거나 자신의 장난스러움과 사람을 희롱한 것을 정죄한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장난스러움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의 영은 아직 그가 사람을 희롱하는 기술로 교만한 것을 느낀다. 그에게는 십자가의 기호가 없다.
 
 
형제의 간증도 이와같이 그 총명에 있어서 십자가의 표시가 없다. 당신은 천연적으로 빠르고 총명하지만 이것들은 거절되어야 하며 저주해야 할 부끄러운 것이다. 당신에게는 반드시 십자가의 상처가 있어야 한다. 마치 당신의 민첩함과 총명이 움직이기만 하면 주님이 칼로 찌르신 것처럼 통증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총명한 사람에게 우둔한 사람으로 변하여 당신의 천연적인 것을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마땅히 움직이기 전에 통증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때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것이다.
 
 
빛에 의해 비춤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땅에 엎드러진다. 한 사람이 정말 자신의 죄를 정죄할 때 그의 영은 사람으로 편안하게 한다. 모든 빛을 본 사람은 분명할 뿐 아니라 흐리멍덩하다. 바울이 빛을 보았을 때 삼일 동안 눈이 멀었었다. 이 여러해 동안 당신은 총명과 민첩의 길을 걸었지만 주님의 바른길을 걸을 수는 없었다. 주님이 당신으로 넘어지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만일 당신이 우리의 천성은 교만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것은 끝나게 된다. 이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법칙을 알 수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이고 사역의 길에서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뛰어남을 인해 만물을 해로 여기고 또 자신이 이전에 어떠했었는가를 말했다. 이런 말들은 정말 사람의 영으로 만족하게 한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읽을때 비록 그가 천재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지만 그러나 그가 십자가의 상처를 받은 사람인 것도 보게 된다. 그는 감히 자신을 믿지 않고 교만하지 않았고 두렵고 떨었다.
 
 
우리도 반드시 이 길을 가야 하며 십자가의 표시와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총명이나 민첩함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십자가를 거쳐서 상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상처가 있으면 사람은 그것을 영광스럽다거나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어려움으로 보고 그것을 미워하며 파쇄하려고 할 것이다. 그 때 감히 교만할 수 없으며 진정 교만함이 없이 잿더미 가운데 엎드려 전적으로 하나님을 앙망할 것이다. 자신이 넘어지고 소용없게 되며 흐리멍덩하게 변하고 마치 길이 없는 것같이 된다. 당신에게 길이 없을 때가 바로 당신이 곧은 길을 가기 시작할 때이다.
 

 



육체와 그리스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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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능력을 앎

 

 

세 동역자가 보내심을 받은 후 새로 세움을 입은 동역자가 투덜대고 있을때,

워치만 니 형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앞에서 아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 세 사람은

많은 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은 구원받은 체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비록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인식과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알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를 아는것(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당신이 피를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피가 양심을

깨끗케한 체험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야합니다.

 

당신이 십자가의 도를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에게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떤 실제이지 결코 교리가 아닙니다.

 

 

 

육체와 그리스도의 일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생활할때 우리에게 가장 해를 끼치는 세가지 대적이

있다. 하나는 세상으로서, 아버지와 상대되며 우리로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한다(요일2;15). 두번째는 사단으로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복할 수 없게한다. 세번째는 육체로서, 우리안의 성령을 거스르므로(갈5;17)

성령과 상대된다. 삼일하나님과 상대되는 삼일대적이다.

 

오늘날의 어려움은 허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묶여

애굽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또 어떤이들은 하늘의 위치 곧 주님의 승천하신 위치에 대해 들어본적도 없고

또한 체험한적도 없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묶여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육체의 일이 개인 생활에 나타난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에도

육체의 일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무릇 천연적인 것은 다 육체이다. 나면서부터 있는 것이다.

 

육체를 심판한 사람은 교만이 없게 된다.

만일 육체를 심판한 사람이 교만하다면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낄것이다.

당신의 육체가 심판을 받은 후에는 모든 영광을 당신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다 주님께 돌리게 되므로 당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길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은 매년 몇십명이상을 만날 수 있지만

자신의(타고난 것)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새창조

이지 옛창조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일의 가치는 일의 결과에 있지 않고 일의 근원에 달려 있다. 나 자신이

했는가 하나님이 하셨는가...

 

주여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행한 모든 것을 인해 죄를

자복합니다. 심판대의 빛으로 오늘 우리 자신이 한 일을 빛비춰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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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벧전4:1).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성경의 가르침은 상당히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으시다. 어떤 철학 사상은, 사람의 육체는 고통을 받아야만 하며 복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떤 누림도 옳지 않다고 여긴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인 우리는 이러한 철학 사상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사상이 아니라는 것에 분명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는 그분의 자녀가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시편 23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므로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방금 밥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죽 한 그릇을 준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는 배 불러서 더 필요치 않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시편 23편 1절의 뜻은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므로 우리는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배부르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도 아낌없이 주신다는 말이다.

 

구약 성경이 줄곧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과 항상 분별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하를 막론하고 고센 땅은 애굽과 달랐다. 하나님은 고센 땅을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행을 제창하는 그러한 철학 사상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오면, 즉시 기독교는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시련과 채찍질에서 예외가 되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도 시련을 주시고 채찍질을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고행을 제창하는 그런 철학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돌보시고, 돕고, 공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필요한 때에 그분은 또한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하시고 시련을 주신다. 이것은 결코 그분이 날마다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채찍질하시지, 결코 매일 매순간 그렇게 채찍질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을 하시고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하시지만, 보통 때는 항상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보통 때에 그분은 늘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다. 만일 우리가 완고하여 굴복치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시련을 계속 주시고 채찍질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배하심에 있어서 그분은 늘 평상시에 하고자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좋은 것을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며,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결같이 택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은혜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것을 말하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길은 바로 선택하는 길이다. 그것은 마치 다윗을 좇으며 생활한 세 용사가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물 한 모금을 원한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생명을 초개(草葬)같이 여기고 다윗의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나갔던 것과 같다(삼하23:14-17).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규정된 것이 아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아주 기꺼이 고난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많은 고난은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심기기 위하여 보통 사람과 다른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격이다. 만일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어떤 일도 잘할 수 없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이 점이 부족하다면 그의 일은 매우 얕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만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점을 약간 언급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곧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란 말의 의미는 이러하다. 우리 내면이 하나님 앞에서 갈망을 가지며, 우리 마음이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고난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항상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자신을 드리고 달게 고난을 받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주님이 당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좋은 가구로 장식된 비교적 좋은 집을 주신다면, 당신은 그것을 누리고 사용할 수 있다. 주님이 만일 이렇게 안배하셨다면, 당신은 주님 앞에서 그것들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여전히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비록 지금 당신의 육체에 고난은 없지만 당신의 마음가짐은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당신 내면의 마음가짐이다. 모든 것이 좋은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고난받도록 안배하시지는 않지만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하루라도 고난받을 마음의 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고난이 매일매일 당신의 생활에 꼭 있지 않을지라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매일매일 있어야 한다.

 

많은 형제 자매와 많은 동역자들의 가족들은 단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좌절한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순탄한 환경을 안배하여 우리로 물질면에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우리의 몸도 건강하게 하실 때에, 우리는 매일매일 주님께 봉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순리적이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일에 조금의 시련만 닥쳐와도 우리는 곧 무너져 버리는데, 이는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것을 잘 예비하는 것이며, 마음에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난받는 길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받지 않도록 안배하실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일이다. 우리 편에서는 다만 언제나 고난받을 것을 예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안배가 바뀌어서 시련이 우리 몸에 닥칠 때에도 우리는 응당 이것을 감당해야 하며 조금도 이상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면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환경을 안배하실 때에는 당신이 받아들이겠지만,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당신은 즉시 물러나거나 혹은 사역을 중단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은 당신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먹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은 입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편안해도 이렇게 하며 편치 않아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건강할 때도 이렇게 하며 몸이 약할 때도 이렇게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곧 병기(兵器)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병기의 위력은 대단하여 사탄이 이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은 사역을 할 수 없게 되고 즉시 멈추게 된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고난을 잘 참고 견며 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보배로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전혀 없게 된다. 그들은 때로 심지어 속에서 원망하며, 원망의 말을 한다. 그들은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이 고난을 잊어버릴 것에 대한 간구만이 있을 뿐 어떠한 찬미도 없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서 그들에게 닥친 것들은 그들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속에서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기만을 갈망한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여 준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한 날들을 허락하셨을 때,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주님이 당신의 길을 순탄케 하실 때는 당신이 전진할 수 있겠지만, 길이 진흙투성이일 때에는 봉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것은 옳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고 해서 곧 고난받는 것은 아니다. 당신에게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더라도, 주님이 반드시 당신으로 고난받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난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내면에 이미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으므로 당신은 좌절하지 않게 된다.

 

고난받는 사람이 모두 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록 고난을 받고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거의 매일 그 속에서 구출되기를 외치고 그 괴로움을 부르짖으며 그런 날들이 어서 속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고난만 받을 뿐, 결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

 

그러므로 신체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기타 모든 일에서 시련을 받는 형제 자매는 주의해야만 한다. 주님 앞에서 당신에게 계산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당신이 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물론, 당신이 만난 것은 큰 고난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는가? 당신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혹은, 당신은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스스로를 연민하고 자신을 참소하지는 않았는가?

 

사람에게 아주 많은 심중의 괴로움이 있을 수 있고 많은 실제상의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고난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다는 것은 반드시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 또한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차이점을 발견하는가? 이것은 마치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영 안에서 빈곤하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면에서는 빈곤하지만 영 안에서는 빈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많은 형제 자매가 분명히 고난을 받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에게 선택하도록 하신다면, 그들은 단 일 개월의 고난받음도 원치 않으며 하루 혹은 일 분의 고난받음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전혀 없다.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 가짐이 없는 사람은 사역에 있어서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외적인 요구가 그의 능력에 지나칠 때 그는 즉시 좌절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드릴 것을 요구하면 그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귀중히 여기는 그러한 것에 관한 한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순탄한 날들 속에서 가장 순리적인 일들만을 할 수 있다. 그는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모든 방해 요소를 가져 가시고 그로 하여금 여기서 평안 무사히 일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이처럼 바란다면, 이것은 아주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반드시 무엇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평안한 가운데 있는 형제가 그의 고난받을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시련중에 있는 형제보다 더욱 강할 수 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으므로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잘 예비한 것이다. 반면에 고난중에 있는 그 형제는 결코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원치 않는다. 한 형제는 평안중에 있고 다른 한 형제는 시련중에 있는데,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시련중에 있는 형제가 분명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중에 있으면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그 형제를 더욱 귀중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지 고난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고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아야만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몸에 한 가지 요구가 있으신데 이 요구에 잘 부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이것으로써 병기를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이 병기가 없다면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싸울 방법이 없다. 당신은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후퇴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조금만 대가를 요구해도 당신은 견디지 못한다. 주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조금만 고통을 겪게 해도 당신은 즉시 좌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고난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묻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얼마나 있나를 묻는다.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많이 입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많이 받은 형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뜻밖에도 그에게서 조금의 도움도 얻지 못하며, 후에 그에게는 본래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었으며, 그는 고난받는 것을 달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에게 선택을 하게 했다면 그는 고난받는 것이 단지 일 분이라 해도 도망가려 했을 것이다. 그는 고난을 받았지만 그 내면에는 조금도 기꺼운 마음이 없다. 그는 비록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공과도 배우지 못했으며 그의 내면은 배반으로 가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고난받을 마음가짐과 고난받는 것이 결코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다(고난받을 마음을 품지만 고난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난받는 것으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보기로 하자. 예를 들면, 어떤 때에 하나님이 마치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예비하심이 충분치 않은 것처럼 우리를 이러한 재정적인 궁핍의 시련 가운데 두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물질적으로 조금만 궁핍해도 우리의 사역을 멈추고는 주님이 우리를 어쩌면 그토록 야속하게 대하시는가라고 생각한다.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섬기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라고 물으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당신이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는가가 하나의 큰 관건이다. 당신은, 『나는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조금만 시련을 받아도 즉시 멈추고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의 사역자도 맑은 날에만 일하러 나가고 비가 오면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는 사역자는 없다. 만일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가짐만 있다면 어려움이 닥쳐도 당신은 이렇게 하며 고난이 와도 당신은 해낸다. 병이 들어도 하며 죽음이 닥칠지라도 당신은 그렇게 행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을 때 당신은 당당히 서서 귀신에게, 『어떤 것이 와도 나는 해낸다.』라고 말한다.

 

당신의 내면이 만일 무엇을 두려워한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손쉬운 미끼를 제공하여 당신으로 떨어지게 한다. 만일 당신이, 『굶주려도 나는 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또한 사탄이 당신에게 굶주림을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만일 당신이, 『추워도 난 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사탄이 당신에게 추위를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간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病)이 무섭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반드시 당신에게 병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병들자마자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도 무섭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방법이 없다. 만일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사탄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점을 이용해서 당신을 다루므로 당신은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잘 예비되어야 하며,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와도 여전히 일을 하며 저것이 닥쳐도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가정에 시련이 닥쳐도 하며 신체의 질병이 생겨도 이렇게 해야 한다. 굶주림이 와도 추위가 와도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당신에 대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당신이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당신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으면 즉시 사탄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가져와서 당신으로 실패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에서 후퇴하게 하며 당신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다음과같이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당신의 사랑의 강권함과 오늘날 당신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해, 천당이 오든 지옥이 오든 결과가 어찌되든 나는 변함없이 이렇게 행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도 이렇게 행하고 좋지 않아도 이렇게 행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의 약점이 사탄에게 붙잡히게 될 때 우리는 즉시 끝나고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당신 내면에서 앞길이 어떠하든 상관치 않고 무엇을 만나든지 주님을 위한다고 이미 작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반드시 고난을 받지 않는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면의 그러한 확신은 견고해야 한다. 만일 당신 내면에 그런 확신과 뜻이 없다면 당신은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무너진다. 만일 당신 내면에 그런 확신이 있다면 어려움을 만나든 만나지 않든 문제가 안 된다. 당신은 보았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고난을 받는 데 있지 않고 도리어 고난받을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러하다. 만일 주님이 당신에게 먹을 좋은 것과 입을 좋은 것을 주시면 당신은 주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지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주님께 감사할 줄 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좋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고 나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있어도 이렇게 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예비되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면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주님을 위하여 사역하러 나갔는데 몸이 약하다면 건강한 사람보다 비교적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내 몸은 건강하지 않아서 잠 잘 침대가 좀 좋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즉시 이 점을 공격하여 당신이 잠 잘 침대가 좋지 않게 한다. 당신의 침대가 좋든 좋지 않든 상관없이 사역은 항상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좀더 안락한 침대를 안배하셨다면 당신이 일부러 딱딱한 마루바닥에서 자려고 할 필요는 없다.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침대를 주셨다면 당신은 자면 된다. 주님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침대를 마련하셨을지라도 당신은 자야 한다. 침대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당신은 언제나 사역을 수행해야 하며, 침대가 좋지 않다고 해서 물러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어떤 형제가 평소 물질 생활에서 좀 궁핍하다고 해서 그에게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물질 생활에 있어서 좀 어려운 환경에 있는 형제가 물질 생활에 있어서 비교적 좋은 환경에 있는 형제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실하게 자신을 주님께 바친 형제에게만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한량이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 당신이 어떤 곳에 갔을 때는 잠자리가 마루바닥이었지만 다른 어떤 곳에 가 보니 마루바닥은 고사하고 다만 짚을 깐 땅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잠이 들기는 하였지만 마지 못해 잠을 청한 것일 수 있다. 그가 비록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고난받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마루바닥에서는 잘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그의 평상시의 생활이 이미 좋지 않은데 환경이 더 나빠지면 어떤 것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고난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평소에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리다가 생활 환경이 안 좋아질지라도 여전히 거기에 안주할 수 있다. 그는 마루바닥에서 잘 수도 있고 짚을 깔은 땅바닥에서 잘 수도 있다. 그는 불평하지 않으며 기꺼이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택하려 하신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고난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시련을 당해도 금방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당신 몸에 한 가지 일만 임하게 해도, 당신은 즉시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점을 보았는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생활의 환경이 낮아지는 그 정도가 한계가 없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받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고난받을 수 있는가이다.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 몸에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우리 내면에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창출해 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사역하러 나갈 때 고난받으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결코 굳세게 사역할 수 없다.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당신은 조금만 어려움이 직면해도 자기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국 이러한 경지에 떨어졌다.』

 

과거에 수년 동안 주님을 섬겨 오던 한 자매가 한번은 울고 있는 다른 한 자매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 그가 자신을 볼 때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중한데 뜻밖에도 이런 지경에까지 떨어졌으니 자신을 위해 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그는 일에 부딪히자마자 그 자신이 먼저 쓰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 괴로움이 몰려올 때 당신의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에 있다. 한면으로는 당신의 고통의 문제이며, 다른 한면으로는 주님의 사역의 문제이다. 당신에게 만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즉시 주님의 사역을 희생한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괴로워하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찌 주님의 사역을 돌볼 마음이 있겠는가?

 

형제 자매여! 우리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기를 배워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사역을 내려놓으면 고난받는 것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지만 사역은 이로 인해 손실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고 이것이 결여되었다면, 어떤 때든지 사탄은 우리로 사역을 버리게 하고 주님의 사역을 희생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할 자로서 하나님이 우리로 살게 하시든지 죽게 하시든지 우리의 책임을 저버릴 수 없고 우리의 사역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항상 끝까지 견뎌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형제 자매가 고난받기를 원치 않는다. 만일 가능한 상황 중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의식주의 필요가 다 채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좋다. 우리는 결코 형제 자매가 일부러 고난을 찾아서 고난받기를 원치 않으며 결코 그 몸에 고난이 더해지기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한면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다른 한면으로 우리는 고난받을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나도 쓰러지게 되며 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실패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고난받을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성경의 요구는 『죽도록 충성하라』(계2:10)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죽기까지 변함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중용(中庸)을 취할 수 없다. 만일 중용을 취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시게 하고 교회나 혹은 나이 많은 형제들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게 하고 당신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편이 낫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중용의 위치에 둔다면, 당신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일에 있어서 어떤 길도 잘 걸어갈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생명을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수중의 사람을 끌어들이기만 할 뿐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리 일을 해도 별로 해내지 못한다. 우리 개개인은 죽기까지 충성하도록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물론 주님은 당신의 충성으로 인하여 당신을 죽으러 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 자신이 지켜서는 안 된다. 주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는 다만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무슨 고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참고 견뎌야만 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만일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당신은 죽기까지 충성할 수 없다. 죽기까지 충성하려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아껴서는 안 된다.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우리에게 있어서 응당 강해야 하며,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는 다음과같이 말할 수 있기까지 강해야 한다. 『주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어떠한 곤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기 원합니다.』

형제 자매여,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이러한 공과를 배워야만 한다. 무릇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한계가 있으며 어느 때인가는 멈추게 된다. 하나님은 마음가짐이 대단한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시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만이 극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를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안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언제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꼭 고난받지는 않더라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항상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것에 상관없이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외적인 어려움도 고려하지 않으며 신체상의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모든 것을 다 바치기 원합니다. 지금 이후로 어떤 고난을 만나든지 그 어떤 것도 내가 주님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고난이든지 즐거움이든지 언제나 나는 이 길을 택하기 원합니다.』

형제 자매여! 효과 있는 한 가지 일은 죽기까지 충성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당신이 그 위치에 서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은 사탄이 당신에 대해 아무런 방법도 없으며 사탄에게 길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므로 조금만 고통을 당해도 그침 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마지 않으니, 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물도 없고 탄식도 없을 것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 모든 형제 자매는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이 정하신 길이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나는 언제나 고난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난받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마땅히 한계가 없어야 한다. 주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실제로 받게 하는 고난은 한정적이지만 당신이 주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한계가 없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위해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라면 당신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일단 제한이 있으면 옳지 않다. 이 요구는 대단히 큰 것이며, 주님은 바로 이것을 요구하신다. 이 요구보다 작다면 하나님을 섬길 도리가 없다. 우리는 기꺼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다만 어느 정도까지만 고난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기꺼이 고난받는 것은 제한 없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해야 한다. 만일 이 요구보다 작다면, 사탄이 당신을 시험하여 당신으로 설 수 없게 할 뿐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만일 당신이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 사탄에게 승리의 간증을 하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사탄도 당신에 대해 어떠한 힘을 쓸 수 없다. 사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을 다룰 어떤 방법도 없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사탄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일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욥을 그렇게 공격하였다.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2:4-5).

사탄은 욥의 생명을 만지고 욥이 그의 생명을 아끼기만 하면 자신에게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사탄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실패는 바로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 데에 있다. 우리는 다음과같이 물어야만 한다. 『사역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우리의 책임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사람의 영혼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하나님의 교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간증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자기 자신을 아끼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또한 고난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 끝없이 고난 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 『비록 죽을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다.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고난받기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도록 예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목숨을 잃게 하실 뜻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형제 자매들의 많은 일에 있어서의 실패는 모두 자신의 나태함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과 자신을 버릴 수 없는 것에 기인한다. 세상 사람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거나 형제 자매들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여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역하러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떤 것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사람들도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보류하거나 중용의 길을 고수한다면 그들 역시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드리라고 하셨다. 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중 한 사람도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고 생명을 아끼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연민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역에는 언제나 제한이 있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얼마 있다면 영적인 일도 그만큼 있게 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면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제한적이다. 고난을 받으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면, 우리가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도 제한적이며 우리의 사역의 결과도 제한된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얼마인지 헤아리지 말고, 오직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얼마인지를 측량하라. 만일 고난받으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한량 없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워치만 니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한국복음서원]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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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 함

 

화수은 자매의 본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하는 데 있어서 화수은 교사는 니 형제님에게 아주 중요한 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보다 우리의 어떠함을 더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모든 일은 이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화수은 교사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명을 강조하고 그녀의 일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가를 보았다.

때때로 화수은 교사와 함께 기독교에 있는 사람들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는 언제나 전파하는 이의 구변과 지식과 열심과 재간 혹은 천연적인 설득력을 감상했다. 그럴 때마다 화수은 교사는 그가 경탄해하는 그것이 생명이나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지적해 주었다. 그가 경탄해하는 것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어떤 일들을 하도록 자극할 수 있지만, 결코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적인 일의 진단을 통해 그는 가르침을 받아 생명과 일의 차이점을 분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대다수의 전도자와 기독교 교사들의 설교가 생명의 씨앗이 아닌 쭉정이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대다수의 기독교의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나 그 안에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매우 적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주 예수님의 발자취

 

니 형제님은 동역자들에게, 사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은 사역하실 때 사람의 환영을 주의하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군중들이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이 자주 피하셨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자주 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씨로 뿌리셨고(마 13:3),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그분의 속에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고 말했다(요 12:24).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것의 위험성

 

그는 나에게, 자기보다 다섯 살 위인 동역자가 두루 다니면서 전도회를 열 때 화수은 교사가 사람의 환영을 받는 것의 위험성을 알고서 그에게, 『만일 네가 곳곳을 다니며 전도의 일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러한 일이 그의 영적 생명을 해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그 동역자는 영적인 생명에서 사람의 환영을 받는 일에 빠지게 되었다.

니 형제님은 사람의 환영 받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명성을 얻기를 두려워했고 사람의 칭찬과 높임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사람의 이러한 환영이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 젊은 동역자로 하여금 생명의 올바른 노선에서 빗나가게 하는 시험의 도구임을 보았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의 멸시와 반대와 거절과 참소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것들을 그를 생명 안에서 보호하고 주 안에서 더 자라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여겼다. 이러한 이상은 그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있어서 더욱 주님과 하나 되게 하였고, 주님의 인도를 더 쉽게 따르게 하였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얻은 이상을 일의 방식이 아닌 생명의 방식으로 실행했다.

 

양이 아닌 질(質)을 중요시함

 

니 형제님은 고린도 전서 3장 12절부터 15절을 통해 우리의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닌 질임을 보았다. 금과 은과 보석은 언제나 양이 적고 질이 높은 반면에, 나무와 풀과 짚은 언제나 양은 많으나 질이 낮다. 나무와 풀과 짚은 불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나 금과 은과 보석은 불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우리는 장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일의 양에 따른 것이 아닌 우리의 일의 질에 따른 것이다.

 

생명의 넘쳐흐름

 

어느 전도자가 성공적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거나 어느 기독교 사역자가 방대한 일을 했다는 것을 들을 때, 그는 항상 그의 훈련을 받는 우리들에게 참된 일은 생명의 넘쳐흐름임을 알려주었다.

니 형제님의 지식과 은사와 재능에 의하면, 그는 아주 용이하게 기독교 안의 많은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면에서 그의 은사와 지식을 남용하지 않았다. 은사와 지식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그는 언제나 그의 일이 온전히 생명 안에 있고 생명에 속하고 생명으로 말미암으며 그의 일이 곧 생명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속박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생명의 넘쳐흐름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만족하였다.

그의 사역은 192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의 사역 아래서 산출된 상해 교회는 1927년에 일으켜졌다. 1933년 말 내가 처음 상해에 그를 보러 갔을 때, 그곳 주의 회복 안의 모임의 성도 인수는 백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1928년 2월, 그가 상해에서 이기는 자 집회를 인도했는데, 참석자는 전국의 모든 동역자와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참석 인수는 삼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육년 이상 사역을 했지만 주의 회복의 성도 인수는 여전히 아주 적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도리어 큰 격려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 적은 숫자는 그의 사역의 열매였기 때문이다.

주님을 찬미한다! 니 형제님이 외면적인 일을 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역의 생명의 결과는 이미 온 땅에 퍼졌다. 오늘날 그의 책을 통해 기독교계에 범람하고 있는 그의 사역의 일부는 그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일로부터 나온 생명이다. 그에게 있어서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오직 생명만이 모든 것이었다. 내 일생에 걸쳐 알아온 사람들 중에 그만이 유일하게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했던 사람이다.

다음은 1928년 7월 부흥보 제4기에 실린 그가 쓴 공개 서신에서 발췌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어떤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진동시킬 만한 큰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음을 깊이 믿는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관심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근시안적인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무언가 보고하는 일을 신뢰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하나님이 흥분 가운데 계시지 않음을 모르고 그러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듣기 좋은 말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실로 오늘이야말로 전무후무하게 영적인 일과 혼적인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때라고 느낀다."


워치만 니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 함", 한국복음서원]



생명(ZOE) 이란?


십자가체험 2011-03-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www.chch.kr/Hannah/27093.html

 

 

생명(ZOE) 이란?

 

 

A. Life is Daily (생명은 매일의 문제이다.)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 번제로 드릴 나무를 항상 태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주님께 헌신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만나를 어느날 아침에 많이 거두었다고 해서 그들이 일주일 동안 거두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시 88:9)." 우리는 매일 주님을 불러야합니다. 신약에서도 매일 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그들은 매일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매일 이루어지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정말 생명에 대해 진지한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우리가 언제 십자가를 져야합니까? 여러분이 어떤 때는 말씀을 대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고, 어떤 때는 기도하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정집회(Home Meething)에 가고 싶지 않다고 느낄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느낌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B. Life is Small(생명은 작다)

    특별히 미국인들은 큰것을 주의합니다. 체험도 큰 것만을 중요시합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만나는 작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 작은 체험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침례자 요한에게 왔을 때 그분은 위대한 종교 지도자로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어린 양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작은 어린 양의 피를 적용하는 많은 작은 자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만 "주여! 죄송합니다."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심지어 주님은 어린 양보다 더 작은 비둘기로 소개되었습니다. 부드럽고 날아가는 비둘기는 우리안에 기름 바르는 영을 상징합니다. 다만 살짝 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비둘기를 지나치기가 매우 쉽습니다. 내가 말하거니와 비둘기와 함께 할 때 우리는 살아 있게 됩니다. 한 번은 나이든 형제님과 함께 식당에 갔는데, 어린 형제가 "저는 왜 이렇게 죽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죽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나이든 형제님은 "작은 것들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대부분 작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있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예복도 성도들의 의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예복은 성도들의 작은 한 뜸 한 뜸으로 만들어집니다. 생명은 조그만 체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여러분의 가정에 올 때 주님은 여러분에게 조그만 느낌 곧 "내가 정말 그들을 돌보아야겠다"라는 느낌을 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조그만 느낌에 순종할 때 생명이 흘러 갈 수 있습니다.

 

C. Life is Slow(생명은 느리다)

    생명은 느린 것입니다. 빠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인삼 뿌리가 싹을 트고, 발아하는데, 8개월이나 걸린다는 것을 아십니까? 풀은 2주 만에 싹이 나와 바로 자라납니다. 그런데, 인삼뿌리는 8개월이 걸립니다. 신성한 생명도 자라는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 생명은 천천히 자랍니다. 젊은이들이 여러분의 집에 왔을때 "너무 가련하다"라고 여러분은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때 여러분은 인삼 뿌리를 뽑아 자라게 하려는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인삼뿌리는 당신이 뽑아서 자라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삼 뿌리는 물주는 것, 햇볕, 거름 등을 필요로 합니다. 생명은 천천히 자라는 것이고 빠르게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아침 아침부흥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살아있게 됩니다.

 

 

D. Life is Hidden(생명은 감춰져 있다)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5:15-16)." 세상은 공개적으로 많이 모여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밖의 많은 활동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주된 관심사는 한적한 곳에 가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청년들을 우리 가정에 데려 오는 것은 흥분되는 일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구원 받기 시작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의 교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감춰진 생활을 살지 않는다면 청년들에게 흘러 갈 것이 없게 됩니다. 마가복음 결정 연구집회에 참석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감춰진 개인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E. Life is Corporate(생명은 단체적이다)

    우리는 항상 감춰진 생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Watchman Nee 형제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안다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 없이도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특히 여기 있는 모든 사랑스런 자매님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있을 시간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과 우리 자신의 문제, 우리의 아이들 등에 고착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세 명이 함께 모여 기도함으로 가정집회(Home Meeting)을 위해 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생명 안에서 보존되게 할 것입니다.

 

F. Life is Mysterious(생명은 비밀스럽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골1:27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산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은 우리들을 외적인 방식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러분에게 비밀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휴가를 내서 애나하임으로 훈련을 받으러 간다고요? 학교를 졸업하고 전시간 훈련을 간다고?" 그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안다면 사람드른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을 돕는 항목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올 때 뭔가 흘러가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화’의 의미와 관련 성경구절들


변호와확증 2011-03-2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913.html

 

‘신화 의미와 관련 성경구절들

 

신화(神化) 진리는 구원론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에 대한 구원이 무엇을 최종적으로 지향하는가에 대한 논의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정통교부들이 말해 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계 대부분의 성도님들에게 진리가 생소한 것은 로마 천주교 천년 암흑기를 거치면서 특히 서방교회 성도들에게 진리가 차단되고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부들은 당연히 성경을 근거로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헬라어 원문을 읽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목표를 말하는 소위 신화 진리를 성경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역사적 교회의 유산을 무시하거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그만큼 얕다는 반증일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보통 죄사함 또는 지옥 안가는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또는 세상에서 분별되는 등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깊은 구원의 본질은 아래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 상호내재 방식의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우리에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 너희가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5)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늘 높은 보좌에만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면에서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1:27),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14:20). 이러한 유기적인 연합을 주와 연합하여 한영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고전6:17).

 

그런데 거듭남으로 이러한  연합의 실재가 우리 안에 있게 이후,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뿐아니라 혼을 포함한 우리의 마음에까지 자라가시고 (3:17) 궁극적으로 우리의 몸까지 그분과의 연합이 확대될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과정들을 성경은 거듭남(3:6)-거룩케됨 (6:19)-새롭게됨(12:2)-변화(고후3:18)-형상을 본받음(8:29) -영화롭게됨(8:30, 3:21)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과정들은  14:20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바울이 전한 구원 또는 바울이 전한 복음(1:11, 1:15) 이러한 구원의 모든 단계들을 포함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죄사함(칭의)만을 구원의 전부인양 말하거나 또는  거듭남과 사후 천국만을 강조하는 식의 구원론은 좋게 말하면 <부족한 구원론>입니다. 성경적인 구원론과는 <다른 구원론> 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부족한 구원론> 표준이 되고 <성경적인 완전한 구원론> 비판을 받는 상황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구원개념 자체를 설명드렸습니다. 이제는 구원 개념을 조금 다른 각도 신화 개념과 연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원래 아버지의



구원론-아타나시우스의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 함이라"(3)


변호와확증 2011-03-2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901.html

 

육체 되심은 신성을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심

 

육체 되심으로 신성이 인성 안으로 이끌어졌고 하나님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이제 하나님과 사람은 연결되어 신성과 인성이 서로 감소됨이 없이 동시에 공존하는 유일한 한 사람을 산출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시다. 육체 되심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분은 자신의 인간 생활 동안 은혜와 실재를 나타내셨다(1:14). 그분은 사람이 배운 적이 없고 배울 수도 없었던 공과인 순종을 배우셨다( 5:8). 또한 그분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생활의 본이 되셨다(벧전 2:21, 13:15, 11:29). 그분은 인간 유혹의 시험을 통과하셨지만 죄에 굴복하지 않으셨다(4:15). 이런 것들을 통해 그분은 사람을 위해 죽으시기에 자격이 있는 분이 되셨다. 그분이 사람으로 오심으로 그리스도는 잃었던 것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하셨다(19:10). 이 구원은 물론 우리의 구속을 포함한다. 그분은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1:29, 9:26, 벧전1:19)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시고자 했다. 그러므로 육체 되심 안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 보시고(2:9) 죽음을 통해 죽음을 멸망시키셨다(2:14; 딤후1:10; 고전15:54-56, 26). 이 모든 것은 신성이 인성 안으로 이끌어질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들은 주로 예수님의 인성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그분의 신성으로 인해 영원한 효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우리의 죄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를 타락한 상태에서 온전히 회복할 수 없다. 사람이 타락했을 때 그는 생명나무의 길을 잃었다(2:9, 3:24). 생명 나무는 사람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2 10절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또 하나님을 통하여 존재하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안으로 이끄시려고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영화롭게 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여겨졌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리스도가 먼저 거룩하셔야 했다. 이것이 4세기에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했던 아타나시우스와 다른 이들의 주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그리스도는 또한 사람이셔야만 했다. 육체 되심을 통해 그리스도는 거룩케 하시는 근원인 신성을 거룩케 하시는 대상인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신화와 동의어인 거룩케 하심은 믿는 이들이 죄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들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본성의 변화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의 본성의 속성인 거룩은 하나님을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로 부터 분별함이라고 정의된다. 하나님 한 분만이 거룩하시다(15:4). 이렇게 말함으로 우리는 그분이 모든 것 가운데 유일하시고 모든 것들로부터 분별되신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케 됨, 즉 거룩하게 만들어질 때(1:4, 1:22)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서 따로 계시는 하나님이신 그분의 거룩에 참여한다. 이 참여가 곧 우리의 신화이다.

 

히브리서 2 10절과 11절도 거룩하게  됨을 믿는 이들의 아들의 자격과 동일시한다. 10절에서 말하는 영광 안으로 이끌어진 아들들이 바로 11절에서 말하는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동일시 또한 신화를 암시한다. 이후에 보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의 한 방면은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들로서 우리는 개인적으로(혹은 보다 전문적으로 말해 본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종류에 따르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모든 생물의 후손들은 인격에 있어서는 그들의 아비들과 동일하지 않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같다. 히브리서 2장에 따르면 우리는 거룩케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 안으로 이끌려지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으로 신성을 인성 안으로 가져오셨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의 최고의 목적은 바로 이 거룩케되심 즉 신화이다.

 

부활은 인성이 신성 안으로 이끌려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유 또한 복합적이다. 유감스럽게도 개신교는 육체되심과 마찬가지로 부활에 관해서도 편협한 관점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들을 위한 그분의 희생의 효력을 입증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기초로 이해된다. 로마서 4 2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우리의 허물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런 법리적인 목적이 있지만, 법리적인 방면이 부활의 목표의 전부는 아니다. 의롭게 됨은 그 정의로 보자면 법리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로마서 5 18절은 “생명의 의롭게 됨”이라고 말한다. 헨리 알포드(Henry Alford)는 이것을 “생명을 주는, 혹은 생명으로 이끄는 의롭게 됨”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의 증거로만 보는 것은 확실히 너무 좁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영역 안에 있는 유기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의 부활의 본성과 관계가 있다. 부활의 효력 또한 사람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유기적인 문제이다. 그분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이것이 우리가 사려깊은 관심을 두어야 할 부활에 대한 더 높은 관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효과를 두 가지 관점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즉 그것이 그분 자신께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와 그분의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과 온전하신 사람으로서 우주 가운데 유일한 분이다. 신격에 있어서 그분은 독생자로 불리신다(1:18, 3:16, 3:18, 요일4:9). 이것은 그분을 신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성령과 구분하는 불변의 칭호이며, 다른 누구와도 나눈 적이 있거나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독생자의 신분에 참여할 수 없다. 인성에 있어서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리신다(12:8, 10:45, 9:22, 3:13, 7:56, 14:14). 그분은 온전한 사람이시며 인류를 온전히 대표하신다.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을 영원히 인류에게 위탁하셨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죽으셨고,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나셨고(17:9), 사람으로서 승천하셨고(6:62), 사람으로서 보좌에 앉으셨고(26:64), 사람으로서 영광 안에서 돌아오실 것이고(25:31), 사람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1:31-33). 그리스도는 결코 그분의 인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소한 그분을 믿고 영접한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에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나아간다. 그리스도는 단지 독생자이실 뿐 아니라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시다(8:29).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의 문제와 그 해결책인 성경 안에 있는 하나의 큰 계시에 직면한다. 그리스도는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그러한 분에게 형제가 있을 수 없다. ‘<I>독생</I>이라는 말은 그분이 홀로 태어나셨고, 그분 외에 다른 아들들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들 중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이 이제는 형제들이며, 그분의 아버지가 이제는 그들의 아버지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을 통해 그분은 자기를 믿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3:26, 1:12, 8:14).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다른 형제가 없고 다른 누구와도 아들의 자격을 공유할 수 없는 독생자께서 어떻게 많은 형제가 있고 그들과 아들의 자격을 공유하는 맏아들이실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최종적으로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전에는 오직 그분 안의 신성 부분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분의 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분의 신성의 특성들이 사람이신 그분께 귀속되고, 그분의 인성의 특성들이 하나님이신 그분께 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신학 용어로는 <I>속성교류</I> (<I>communicatio idiomatum</I>)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속들은 서술의 수준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의 신성에서도 실재로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성에서는 본질적으로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육체되심으로 더해진 인성의 속성을 통해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있다(20:28). 그러나 부활을 통하여 그분의 인성은아들화”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부활을 통해 신화되었다는 개념은 아타나시우스의 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SUP> </SUP>이것이 바로 로마서 1 3-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은, 육체에 따라 말하자면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한 영에 따라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영원하신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실 필요가 전혀 없다. 그분은 영원히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인정되심이 있었다. 이러한 인정되심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련된다. 사도행전 13 33절에서 바울은 부활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나신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온전히 이루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제 이 편에 기록된 것과도 같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아들이시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기 이전의 하나의 사건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을 낳고,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분이 영원히 존재함을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시간 안의 어느 한 지점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그분의 아들로 낳은오늘”이다. 여기에서 낳음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신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퍼져 인성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는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그분의 인성 안에서 영화롭게 되고 신화된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말하는 성경 구절들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구절들일 것이다. 믿는 이들의 부활에 관해 바울이 해명한  고린도 전서 15장이 이 문제에 관해 분명하고도 가장 간결한 표현을 제공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45). 마지막 아담은 의심할 바 없이 인류의 마지막인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완전한 의미에서 사람이시다. 생명주시는 영은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고(5:21, 6:33, 63, 4:17, 고전3:6), 신격 안에 두 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개념에 대한 더욱 섬세한 표현을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과 그 영(the Spirit)이 동일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39). 물론 신격의 제3위격이신 하나님의 영은 영원히 존재해 오셨고, 시간상 그 영께서아직 계시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람 예수가 영화롭게 되신 것인 부활을 통해 생겨난 그 영의 방면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 예수의 신화로 본다. 이를 통해 그분의 인성이 하나님이 되시고, 그 인성은 그분의 신성과 함께 생명주는 영에 투자되고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해 (우리와) 소통되신다. 요한복음 6장 또한 비록 덜 분명한 방식이지만 이러한 사상을 포함한다. 53절과 54절에서 주님은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여러분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의 생명의 근원인 그분의 인성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대부분에게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입니다”(63)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분의 생명을 주는 인성이 그 영을 통해 믿는 이들에게 유용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우리는 이 안에서 재차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화를 본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화가 그분의 부활이 그분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임을 보아 왔듯이, 우리는 이제 믿는 이들의 신화도 그분의 부활이 그들에게 영향을 준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분의 인성이 신화됨을 통해 그분은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이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화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이들에게 영향을 준 관점에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긍휼에 따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살아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으며”(벧전 1:3).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통해 거듭났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의 증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아들의 자격을 단지 입양으로 보지만, 성경은 이것을 하나의 출생이라고 말한다(1:13, 요일5:1).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다만 한번의 입양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함을 통해(요일5:12, 벧후1:4), 진정으로 참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을 통하여 우리는 신성의 범주 안으로 이끌려 졌고,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이 되고 신화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점, 즉 그분의 비공유적 신격의 방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화롭게 됨과 신화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방면에서 보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분은 영화롭게 되고 신화된 하나님의 아들들 중 맏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많은 아들들로서 영광으로 이끌려지고 있다(2:10).

 

그리스도는 신성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의 인성은 부활 때 하나님으로 인정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 안에서의 어떠하심과 신화되고 높여진 인성 안에서의 어떠하심 모두에 있어서 본체론적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분만이 하나님 자신의 미덕에 의해 하나님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신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으로 인식되시고, 그러한 인식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다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오직 종류 즉 종()에서만 하나님이 되며 인격적으로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하나님 신분에 의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나,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의존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된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신화에 관한 신약의 용어는 간접적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비록 신약에서 믿는 이들이 하나님으로 명백하게 불린 곳은 한 군데도 없지만, 그들의 신화의 사실은 믿는 이들이 가진 몇 가지 신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법리적인 효과 그 이상이다. 오히려 부활이기에 그것은 주로 생명의 문제이다. 그 첫번째 효과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었다. 즉 그분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 적셔졌고, 그분의 본성은 신화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 이러한 분으로서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를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원형, 창시자가 되셨다(2:10). 그분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로 신화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도록 신화된다.

 

우리가 하나님인 방식

 

우리는 앞에서 믿는 이들이 누리는 신분들이 최소한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시사함을 지적해 왔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될 것인지를 정의하기 위해 이것들을 함께 모아야만 한다. 신약이 사람의 신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누리는 신분들에 대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이러한 함축적인 의미는 분명하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의”라는 가장 신비로운 문구가 암시하는 것도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 이끌려져 그분과 동일시 되는 것이다.)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것은 단지 입양 선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출생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되는 기본적인 수단을 소유한다. 우리가 거듭날 때 받는 신성한 생명 안에는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다. 아버지로부터 난 모든 것이 아버지처럼 되도록 자란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우리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요한일서 3 2절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을 그분의 존재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 요한의 사상을 따르면, 하나님과 같게 되는 것의 증거는 하나님을 뵐 수 있는 능력임을 주목하라. 이것은 교회 초부들의 글에서 뚜렷히 나타나는 개념이다. 우리가 보는 만큼 그것이 된다. 물론 육체의 아들이 인격적으로 아버지와 똑같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인격덕으로 하나님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종류인 것과 같이 우리도 종류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신성한 생명 안에는 신성한 본성이 있고, 신성한 본성을 소유함을 통해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된다. 베드로도 우리가 참되게 신성한 본성을 소유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다고 말함을 통해 단언한다(벧후14). 어떤 이들은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누린다면, 우리가 적어도 종류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닌가? 우리가 이것을 부인한다면 누가 보아도 명백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성을 존중 한다면, 그렇게 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인격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니지만,생명과 본성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종류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불행히도 현대 기독교가  <I>그리스도의 몸</I>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대부분은 그 위력이 거의 빠져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I></I><I></I>이라는 단어는 <I>관리기관</I> 혹은 <I>정치적 통일체</I> 정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I>그리스도의 몸</I>은 믿는 이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은유일 뿐이다. 그러나 몸에는 그보다 더 깊은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보다 오히려 우리의 신체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질적인 면에서 우리의 몸의 어떠함은 비밀한 면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어떠함과 같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의 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격과 인격의 실체적 표현에는 구분이 있다. 그러한 구분은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믿는 이들이 몸으로 불리는 데에서 보듯이 신약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몸과 그리스도의 인격이 동일시되는 것도 의심할 바 없다. 고린도전서 12 12절은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라며 몸 전체를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분의 충만으로서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유일한 머리이시고, 홀로 경배받으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이 땅에서 나타나고 표현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단지 생명과 본성 만이 아니라 표현에서도 하나님이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결국에는 영광 안에 있게 될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영광이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점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22)이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과 승천 안에 받으신 영광이 결국 믿는 이들의 영광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24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도록 하여주시고,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이 보도록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다. 헨리 알포드는 여기에서의 ‘(<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주목하여</I><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 </I><I>바라</I><I>보다</I>(behold)’ 설명하기를,  <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바라</I><I>보고</I> <I>참여하다</I>이다. 바로 이 사례가 그것을 추정한다. 단지 구<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경꾼이 </I>이 영광을<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 </I><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바라볼</I><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 </I><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I>.”(1:882)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대로 참여함을 통해 우리가 바라 보는 그것이 된다는 관념과 일치한다. 고린도 후서 3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이 영광으로 변화되는 연속적인 과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총체인 새예루살렘은 영원 안에서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올 것이다(21:11). 하나님의 변화된 사람들은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게 될 것이다(22:4). 다시 말하지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 바라보는 것으로 변화된다는 개념에 호소한다. 더 나아가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이름이 소유권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이름은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이 된다.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어린양이 삼일성의 제 2격의 신성한 이름인



구원론-아타나시우스의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 함이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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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해와 사용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신화로 최종 완결된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려면 먼저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관찰해 온 바대로 하나님 안에서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의 구분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때문에 사람은 결코 신격에는 참여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삼일성의 네번째 인격이 될수 없고, 결코 신으로 경배 받을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창조물로서의 속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결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영원토록 사람의 형상과 사람의 본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코 편재할 수 없다. 사람은 창조시 부여받은 제한된 정신적 기능을 영원히 가질 것이고, 결코 전지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안과 밖 모두에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은 기껏해야 창조의 제한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만 하나님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신화 개념을 수용하는 많은 현대 교사들은 이러한 전제들을 무시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이 하나님 됨은 모든 점에서 사람의 창조물로서의 위치에 의해 조절되고 제한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창조시의 사람의 어떠함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개념을 가장 크게 뒷받침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록을 보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11, 12, 21, 24, 25).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에는 다른 종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생물의 종()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창조가 다시 언급되었을 때 사람은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우리[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1:26)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창조의 다른 기록에서 말하는 <I>그 종류대로</I>와 연결해서 이해해 보았을 때, 같은 개념을 보다 섬세하고 자세히 언급한 것으로 이해한다.<SUP>6</SUP> 그러므로 이 문장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이해한다. 사도 바울도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게 “하나님의 족속(헬라어 <I>제노스</I><I>, genos</I>, ‘; 종류’) ( 17:29)이라는 유사한 말을 했다.

 

물론 우리도 인류의 슬픈 타락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모양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타락으로 인해 사람은 분류하기 어려워졌다. 사람이 어떤종류”인지 알기 어렵다. 사람은 분명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지만 그 중 많은 생물과 아주 비슷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은 어느 정도는 하나님과 같으나 분명 하나님보다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통해 하나님이 되도록 그러한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신화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창조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받을 수 있는 역량을 가졌을 뿐이다. 타락은 우리 사람이 왜 창조되었는지를 깨닫는 것을 지연시켰고 구속을 필요로 하는 부정적인 요소를 가져왔다.

 

사람의 신화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구속을 하나님의 구원의 주된 항목이라고 이해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타락과 타락이 유발시킨 그분의 격노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의 목적은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완전한 희생 제물을 얻도록 완전한 사람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완전한 내용은 아니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보도록 눈을 열어 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종교 개혁은 많은 방면에서 기독교를 근시안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견해를 너무 좁게 만들어 단지 구속의 방면만을 감사하게 했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의 신화로 보았던 초기 교회는 이처럼 제한적인 구원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육체되심의 목적은 곧 사람의 신화라고 보았다. 물론 그가 구원의 구속방면의 가치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나 교부들에게 구속은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끝을 향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현대 개신교보다 더 폭넓게 보아야 한다. 개신교는 구원과 구속을 사실상 같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보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 구원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 참여하여 그분의 아들들이 되고 그분과 같은 종류가 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의 역사를 폄하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가 거치신 과정 중 다른 두 단계인 그분의 육체 되심과 부활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요소들인 우리의 죄들과 마귀와 세상과 옛사람과 옛창조와 자아를 다루는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긍정적인 방면은 그분의 육체되심과 부활을 통해 확고해진다. 육체 되심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가 되셨고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그분의 본성을 소유하고, 그분의 영원한 표현을 위해 그분이 된다. 육체 되심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두 가지 위대한 과정을 거치셨다. 육체 되심을 통해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셨고, 이로 인해 신성을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1:1, 14). 부활을 통해 그분은 여전히 사람이시면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으로 선포되심으로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1:3-4).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히 구원하시고 영원히 표현되시기 위해 그분이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움직이시는 것이 초기 교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퍼온 글 - 글쓴이 김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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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아타나시우스의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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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지방교회측의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A&C) 1996 7월호에 실린 케리 로비쇼우의 논문인 “…that we might be made God(21-31)를 번역한 것입니다. 아래 번역은 영어 원문이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한국어 독자들이 신화관련 주제에 대해 바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목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것임을 밝혀 둡니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원 저자의 주장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은 분들은 반드시 영어 원문을 확인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원출처: http://www.affcrit.com/pdfs/1996/03/96_03_a3.pdf ).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케리 로비쇼우

 

4세기 때부터 전해 오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위 경구(警句)<SUP>1</SUP>는 수세기에 걸쳐 그의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글에 대한 반응은 크게 기뻐하는 것부터 매우 애통해 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이 고수한 정통 신앙의 다양한 기준과 비교해 볼 때, 아타나시우스의 두드러진 선언은 일부에게는 기독교 신앙의 완벽한 본으로 여겨졌고, 다른 이들에 의해서는 기독교 이단의 한 예로 여겨져 왔다. 많은 이들은 그의 진술이 니케아 정통 보수자들의 사상 및 글과 일치한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인격, 즉 우리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바로 그 문제에 관한 통념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필자가 이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 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아타나시우스가그분이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가 신성하게 된다.” 라고 한 말을 완화되게 해석함으로 이 걸림돌을 적당히 피해가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 방법에 의해 두려움은 확실히 완화되지만, 아나타시우스의 글들과 그와 동일 시대의 글들을 더 읽어보면 많은 경우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SUP>2</SUP> 신학적으로 소위 신화(<I>theosis 또는 deification</I>)에 관한 이러한 초기 글들은 그 자체의 가치로 평가해 볼 때 분명 실제로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대로를 의미하며, 초기 교회의 많은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그분의 역사라고 보았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자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e Pelikan)은 “헬라 교부의 전통, 특히 그 신비한 형태에 따르면, 신화가 이 구원하는 지식, 죄의 용서, 죽음으로부터의 구출의 최종 목표요 결과였음.(155)을 확증한다. 4세기와 5세기에 토론되었던 구원과 성령의 관계에 관해 펠리칸은 다른 곳에서 그러나 구원은 단지 생명주는 것만이 아니라 신화이다.”(216)라고 간략하게 정의한다. 펠리칸이 같은 책의 색인에서 “신화”라는 표제아래서구원을 <I>보시오</I>” 라고 한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384)

 

다수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초기 교회의 신화 교리를 중요한 성경 진리로 보기 보다는 헬레니즘의 잔존물 정도로 일축하기 쉬운 듯 하다. 하르낙(Harnack)이 신화 교리를 이교도적이고 고대 그리스적이라고 규정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성경 학자들이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개념을 즉석에서 비성서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일도 흔하다. 예를 들어 버터워트(G.W. Butterworth)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의 신화에 관한 글에 대해사람이 이 세상에서 신으로 존재한다거나 다음 세상에 신이 된다는 것을 희미하게라도 암시하는 곳은 신 구약을 통틀어 한 군데도 찾을 수 없다.”(163)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교를 거세게 비난하면서 신화 교리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초기 교회 저자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이 완전히 이교도적이고 고대 그리스적이고 성경의 의도와 동떨어져 있었다고 가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초기 교회는 신화를 이교도의 신화 교리와는 뚜렷하게 구분된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보았던 것같다.

 

신화 교리는 아마도 우리가 기독교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감상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선택적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근대의 믿는 이로서 우리가 초기 교회, 특히 4세기와 5세기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우리는 성경에 제시된 신성한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무엇이 주목할 만한지, 무엇이 적합한지를 고르고 선택한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교회가 실로 진보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의 결함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대부분 2세기부터 5세기 동안 신성한 삼일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많은 진리가 제공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 기간 동안 극소수의 주요 진리가 믿는 이들에 의해 발견되어 위대한 자산들에게 더해졌다. 물론 의심할 바 없이 그 이후의 교사들이 삼일성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몇가지 개념을 잘 다듬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2세기와 5세기 사이에 나온 가르침들의 기본틀 아래 다듬어져 왔다. 이러한 진리의 확고함을 보면 그 영께서 교부들을 더욱 완전한 이해 안으로 인도하신 듯 하다. 이것은 주님이 요한복음 16 13절에서 예언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모든 실재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말씀하시며, 장차 올 일들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세기와 5세기 사이의 교부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삼일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존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그들이 믿고 가르쳤던 것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의 글의 대부분은 교리상으로 비교적 논란이 적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의 영성과 실행 방면 등을 다뤘다. 대체로 이 문제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개신교에 의해 무시되고 일부는 경멸되어 왔다. 물론 이렇게 일부 문제들을 무시하는 데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교회의 일부 실행들은 필수적인 신앙보다는 미신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초기 실행에는 십자 성호를 긋는 것(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손짓으로 자신을 헌신함)이 있다. 이 실행은 천주교와 동방 정교회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근대 개신교 신자의 대부분은 이러한 실행이 전적으로 미신적이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부들의 글을 읽을 때 서슴없이 그 가치를 묵살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저술들에서 우리는 삼일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필수적인 가르침부터 사람의 감상과 미신을 망라하는 폭넓은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현대 믿는 이들인 우리가 이 중 어디까지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물론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정도에 달려있다. 개신교는 삼일성과 그리스도론을 합당하게 정의하는 교리의 끝에 허용 한계점을 둔다. 천주교 계열은 더 넓은 범위를 허용하는 반면, 동방 정교는 거의 모든 범위를 포함한다. 이것이 실지로 의미하는 것은 개신교인들은 대체로 교부들의 글에서 삼일성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위대한 가르침만 받아들이고 다른 내용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현대 개신교에서는 거절되었지만 고대 교회의 첫 5세기동안  기꺼이 받아들여 진 문제 중 하나를 다룬다. 하지만 이것은 사소한 영적 실행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무엇인지에 관한 초대 교회의 기본적인 이해를 다룬 것이다. 이 문제는 근대 개신교에 의해 철저히 거절당해 왔으며, 무슨 의미인지 조심스럽게 그 뜻을 한정하기 전에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다. 그 후에도 오해받거나 더 나쁘게는 뜻이 와전되는 거대한 위험 요소가 수반된다. (여기에도 이러한 위험이 감수되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듯이<SUP>3 </SUP>신화는 사람의 구원의 최종 목표로 여겨졌다.

 

물론 초기 교회가 구원을 신화로 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도에 있어 우리는 이와 동시에 구원에 관한 현대의 유력한 견해가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 나타난 진리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 시대에 사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고 단언한다. 역사 속의 나중 단계에 의해  진리가 더 진보해야 할 때, 우리는 최소한 구원의 내용과 목표에 관한 이해에 있어 보다 원시적이다. 인간이 신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막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설계하신 것에 저항하고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범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화에 관한 초기 교회의 가르침을 주의해서 살펴봄으로써 최소한 함축적으로라도 이 진술을 증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I>신화 </I>라는 용어의 자격조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I>신화</I>라는 용어를 조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불행히도 <I>신화</I>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의미를 수반한다. 신화에 대한 합당한 이해에 포함되지 않는 이러한 의미들과 유감스럽게도 결부되었다. 그 중 일부는 성경에서 비롯되고 초기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의미로서 완전히 용인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개신교의 잘못된 편견 때문에 배척되었다. 그러므로 신화의 의미에 조건을 두는 것은 그릇된 관념을 배제하고 잘못된 편견을 조정하기 위함이다.

 

<I>이교적인 의미들</I><I></I>

 

사람들이 <I>신화</I>라는 용어를 접할 때 가장 흔히 떠올리는 것은 고대 이교도가 행했던 것처럼 사람을 신의 자격으로 높이는 관행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로마 제국에서 아주 흔했다. 황제들을 신으로 대하는 경외심이 다국적이고 다종교적인 로마 제국을 하나로 결합했다. 이러한 황제 숭배는 두 무리에 의해 단호히 거절 당했는데, 바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다. 이것은 분명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인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반응은 또한 신격의 의미에 관한 특별한 관점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방 종교가 신화를 자신의 종교 체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훨씬 용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을 단지 인간보다 조금 우월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방 신들은 사람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다소 타락했으며 인간이 겪는 악덕을 동일하게 가졌던 것이다. 고대 시대는 이방 신들의 육신적인 이야기의 드라마와 음모로 가득 찼다. 터툴리안(주후 220년 사망)사신(邪神)의 수치스럽고 무모한 장난을 나열하고 이렇게 지적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공개되지 말아야 하고, 사실이 아니라면 종교에 큰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날조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30) 이러한 수준에서 신이 되는 것은 인간 존재에서 진보하는 것이나 인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볼 수 없다. 이와 달리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완벽하시며 천지만물 위에 계시고 사람의 모든 결점들을 초월하신다. 이방인의 생각에 가장 고결한 사람은 아주 쉽게 신이 될 자격을 갖추겠지만, 유대인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다 더러운 옷”( 64:6)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특히 구원받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간격은 로마 시대의 황제 숭배 이교가 제안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메워질 수 없다.

더 나아가 고대 이교도들은 단지 선언만으로 신이 되었다. 이 과정은 헬라어로 <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아포테오시스</I> (<I>apotheosis</I>), 라틴어로 <I style="mso-bidi-font-style: normal">콘세크라티오</I> (<I>consecratio</I>)라고 불렸고, 일반적으로 황제가 죽은 후에 일어났다. 그러나 신격화된 지도자가 어떻게 간주되었는가를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전에는 황제로서 존경 받았고, 이제는 신으로서 숭배 받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는 여전히 사람이었다.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근대 대통령의 취임식과 같다. 이전에 그는 직무가 없었고 직무의 존엄성과 경의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취임식을 하는 그 순간 대통령이 된다. 사람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지만 그는 신분 상승으로 인해 시민들의 경의을 얻게 된다. 우리가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속되고 거듭나고 변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자격을 얻을 뿐 아니라 그 본질적인 실재를 가져오는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I>하나님 자신에 대한 전통적인 오해</I><I></I>

 

초기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적인 신화 교리는 거부했지만 신화의 합당한 이해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초기 교회는 어떻게 존재와 본질에 있어 사람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을 최종적으로 신화하는 구원을 희망할 수 있었는가? 바꾸어 말하면 초기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간격이 우리의 구원으로 좁아질 수 있다고 믿었는가? 그러나 이 딜레마는 사실상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그릇된 것이다. 사람의 신화를 하나의 결정적인 가정(假定),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이 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접근하기 때문에 이러한 딜레마를 갖게 된다. 유대인과 현대 기독교인 가운데 압도적인 개념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하시고 그분의 초월성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공유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신학 용어로는 이것을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incommunicable) 이라고 한다. ,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을 자신 외의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바울이 디모데 전서 6 16절에서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에 공유할 수 있는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그분의 육체되심이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는 두 방면이 있으시다. 한 방면은 그분의 만유 위의 초월성과 접근 불가성과 비공유성이고, 다른 방면은 사람에게 오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 인류와 연결하심으로 그분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신 것이다. 초기 교회 교부들의 이해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의 미덕에 의한 것이다.

 

많은 근대 기독교 교사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구별을 부정하는 반면 초기 교회는 이것을 인정하고 가르쳤다. 블라디미르 로스키(Vladimir Lossky)는 이러한 구별이 심지어 초대 교회의 교부들을 포함한 그들의 글 대부분에 나타난다고 했다(71). 로스키가 자신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초대 교부들로는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바질(Basil), 그레고리 나지안젠(Gregory Nazianzen),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디오니시우스(Pseudo-Dyonisius) 등이 있다(71-72). 초기 교회는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만 있으시다는 전제아래서 우리의 구원을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그나티우스 (Ignatius)(주후 107년 사망)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하고 하나님께 참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의 구원의 목표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자주 사용되었다. 초기 교회에게는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물과 떨어져 있는 동시에 연결될 수 있었다. 그분의 비공유적 속성을 통해 유일하고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의 구분을 유지하시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통해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결하고 사람을 그분 자신과 연결하고자 하는 그분의 경륜을 표명하신다. 육체되심은 이 경륜의 첫번째 단계였고, 사람의 신화는 최종 완성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그 이상을 의도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에 관한 그러한 구분은 필수적이다. 구원이 단지 이신득의 (以信得義) 이라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공유되실 수 없고 가까이할 수 없어도 괜찮다.(최종 분석에서는 그러한 제한된 구원의 관점조차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시고 사람과 연결되시는 그분의 공유적 속성의 어떤 것이 요구되지만). 초기 교회의 구원에 관한 평가는 이신득의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연합 안으로 이끌고 우리를 그분과 함께하는 영원한 차원으로 높이는 구원이었다. 구원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고대 교회에 반향하는 우리가 하나님은 그분의 신격에 있어서 유일하시며 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시며,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와 실존에 의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이 홀로 하나님이신 그분과 연합하고 참여함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한 전적으로 합당하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관해 초기 교회가 가르쳤던 것보다 한참 뒤떨어진 것으로 만족한다. 안타깝게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신화를 포함하는 구원에 관한 보다 깊은 관점을 조롱하고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의 근거를 요구하면 그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오직 비공유적 속성을 가지시며 인간의 신화에 의해 성역이 침범되지 않으신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방향에서의 위대한 첫 걸음이신 육체되심, 즉 그분이 자신의 광대한 공유적 속성을 전람하시고 사람과 멀리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가 아니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무시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호해 드리길 소원하는 것같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그분의 사람이 되심 안에서 더 큰 위험에 처해졌다. 신약은 육체되심을 비우심(2:7)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죽으심을 그분의 굴욕( 8:33)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단지 사람이 영원한 수준으로 올려지는 것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영화롭게 되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유적인 방면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그분의 신격의 유일함에 대한 합당한 존중이 더해졌을 때 사람의 신화는 덜 심각한모독”이다. 우리가 그분의 신격의 비공유성을 존중하고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경배를 돌린다면, 그분을 불쾌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반면에 우리가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공급을 무시하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충만히 누리는 데 실패한다면 그분의 은혜와 경륜 안에서 그분을 모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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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온글 - 글쓴이 김바울)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변호와확증 2011-03-2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898.html

1. 웨스터민스터신조 2장 3절의 삼위일체 정의대로라면 그것은 삼신론인가?

 

 답변: 삼신론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웨민 신조처럼 삼위일체론을 <동일본질을 가진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도 진심으로 이 고백에 아멘합니다.

 

단지 최00 목사처럼 <지상사역시의 <성자> 안에는 <성부>는 계시지 않았다. 그렇게 믿으면

양태론이다> 라는 식으로... 어느 한 위격 안에 다른 한 위격(또는 두 위격)의 상호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표현을 할 때> 삼신론 시비가 불거지는 것입니다.

 

역대로 <삼위가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삼위는 페리코레시스 하기 때문이다>

라는 명제가 삼위의 분리불가 원칙으로 용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2.  삼위가 숫자적인 한분이다 라고 믿는가?

 

답변: 이 질문에서 사용된 용어인 <한분>이라는 한국말이 영어의 < Person>(인격, 위격)에 해당

되는 의미라면 저의 답변은, <아니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입니다. 우선 이렇게 간략하게 답변

을 드림으로 저의 입장을 선명하게 정리를 해 둡니다.

 

(박00 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이하에서는 좀더 깊이 들어가길

원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부가적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삼위일체 관련 용어에 대해서 따져 볼

대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웨민 신조 2장 3절에서도 사용된 용어들을 합당하게

정의하는 작업과 연관됩니다.

 

1. 우선 웨스터민스터 신조 영문을 아래에 인용하고 설명을 좀 덧 붙여 보겠습니다.

 

'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Holy Ghost. The Father is of none

(이하생략)

 

(위 영문 출처는 John H. Leith가 정리한 'CREEDS OF THE CHURCHES' 3판 197쪽입니다.

필립 샤프의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III. 607-608쪽도 동일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2. 위 신조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자신의'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서'(영음사) 23쪽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본질상 단일하신 신격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 는 누구로 말미암지 않으시고...'

 

즉 박윤선 박사는 Godhead를 '신격'으로, person을 '위(격)'으로, substance를

'본질' 로 번역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위격이 셋이고 본질이 하나인 분>으로 삼위일체를

정의하는 것은 성경적이며 합당합니다. 이런 정의는 한국의 목회자분들이나 성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른 삼위일체관입니다

 

 

3. 문제는 'substance'(본질)가 아니라 'Godhead' (신격) 기준으로는 과연 '하나님은 몇분

(몇 Godhead)인가' ?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격=위격이 아니며', '신격=본질도 아니다' 라는 전제를 가진 논의입니다.

그런데 위 문맥상 '신격=위격'이거나 또는 '신격=본질'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 세 방면에서 시도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  위 웨스터민스터 신조 <영어문법상> '신격'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명사'이다. 

 둘째.  골2:9에서 쓰인 '신격'에 해당되는 '데오테스(데오테토스)(2320)' 라는 헬라어 역시

          복수가 아닌 단수명사로 쓰였다(이에 대한 한글성경 번역은 정확치 않음.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341쪽 참조) .

 

  셋째. 웨스터민스터 신조 2장 1절 박윤선 역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신데,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there is one only living and truth God)(20쪽). 신6:4의 '우리 하나님은

           한분 주이시며(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고전8:4의 '하나님은 한분 밖에 계시지

           아니한다는 것이라(there is none other God but one)'에서 쓰인 '한분'이라는 말이

           'one Godhead'(한 신격(데오테스) 임을 가정한다면 '하나님은 신격으로는 단수의 신

           격을 가지신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부수적으로 다음 두 가지를 더 언급하고 마치겠습니다.

 

    1) 위 신명기 6:4, 고린도전서 8:4, 6, 로마서3:30, 딤전2;5 등의 성경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there is one God 또는 there is none other God but one)라는 표현에서

        한분이 'one person'(한 인격)을 가리키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한분'은

        'one nature(또는 substance)'(한 본질)을 가리키는가? 물론 그렇게 보는 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본문 문맥에서 '하나님이 한분이시다'

       라고 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한 본질을 가리키는 것' 으로 이해하면 매우 어색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분이다'라는 성경의 선언은 무엇인가? 바로 one Godhead 또는

        'The Godhead'(한 신격)로 보는 것입니다.

 

    2) 이처럼 삼위일체를 논의하면서 'person'와 'Godhead'를 구분하는 근거와 선례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볼수 있습니다. 우선 골2:9나 마3장에서 보듯이 성경에서

       person은 복수의 의미형태로 사용된 적이 있으나 Godhead는 복수형태로 사용된 적이

       없고 단수형태만 발견됩니다. 둘째는 웨스터민스터 신조가 이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지 않고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셋째로 역대로 캅바도기야 교부들도 이런 구분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상 이들은 Godhead(신격)와 Divine nature(신성)을 구분했습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57쪽 참조).

     (퍼온글 - 글쓴이 김바울)



에베소서 1:5의 '위오데시아'의 바른 의미


변호와확증 2011-03-22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897.html

 

 에베소서 1:5의 ‘휘오데시아’의 바른 의미

 

에베소서 1:4-5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세우신 그분의 뜻을 계시합니다. 그런데 그 뜻은 본문에서 이중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4절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인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고, 5절에 의하면 우리가 “휘오데시아(υ?οθεσ?αν, 5206)”가 되는 것입니다.(개역성경은 이 휘오데시아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로 한글킹제임스 성경은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이라고 번역함).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이 둘을 함께 묶어 사람인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관점에서의 구속, 새 생명으로 거듭남, 영적 생명의 성숙인 맏 아들의 형상을 본받음을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엡1:5의 ‘휘오데시아’가 다수의 영어 역본들에서 ‘adoption(입)으로 번역된 것을 근거로,  비록 입양 후 “아들로 받아들여진 자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아버지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을지라도 5절은 “그 궁극적인 목적의 시작인 입양 ”만을 말함으로 “시작의 의미를 목표의 의미로 읽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5 본문이 말하는 예정의 내용인 휘오데시아가 입양 즉 “아들의 시작의 의미” (영적인 거듭남?)인지 아니면 그러한 거듭남의 단계에서 더 전진하여 <영적 생명이 성숙한 단계>까지를 말하는지를 따져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을 근거로 엡1:5에 언급된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내용인 휘오데시아는 사람의 거듭남은 물론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인 생명의 성숙까지를 포함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1. 시대적 배경 속에서의 ‘휘오데시아’ 용례

    사도 바울이 엡1:5에서 사용한 ‘휘오데시아’는 이 서신이 쓰여질 당시인 로마 시대의 전문 법률 용어로서, “어떤 사람에게 전에는 갖지 않았던 아들(sonship)로서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반론자께서 가정했던 것처럼 이 단어 자체가 “궁극적 목적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단어의 그 당시 용례는 아들로서의 모든 법적 권리와 특권을 즉각적으로 부여받는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저명한 헬라어 언어학자들인 빈센트는 그의 <EM>Word Studies</EM>(Vol 3)에서 입양된 사람이 갖는 권리들 중 하나로 (로마)시민권을 예로 제시했고(91), 웨스트도 그의 <EM>Word Studies</EM>(Vol 1) 에베소서 36쪽에서 휘오데시아를 “places him in a legal position as an adult son (huios) (장성한 아들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휘오데시아 자체가  “아들의 시작만”을 의미한다는 반론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실제로 로마서 8:23은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말함으로 양자가 사람의 영의 거듭남만이 아닌 (혼의 변화와) 우리 몸의 구속까지를 포함함을 암시합니다.

 

2. 구속의 목적으로서의 휘오데시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휘오데시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

 

1:5에서 쓰인 ‘휘오데시아’ 라는 같은 단어가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하는 갈4:5 본문 속에도 발견됩니다. 즉 위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속받은 사람들이 <아들의 명분>(한킹,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아들의 명분’(아들의 신분)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칼빈신학 교에서 오랫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 중 한분인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 “구속의 목표는 사람이 타락 전에 있던 상태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지는 것이다….구속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식에서 뿐 아니라 그외 여러가지 차원에서 흠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들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개혁주의인간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50-51). 그는 이어서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네 구절들(8:29, 고후3:18, 3:9-10, 4:22-24)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될 구속의 목표는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 이신 그리스도처럼 되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위 책, 53).

 

만일 이런 관점이 맞다면, 4:5에서 구속의 목적으로 언급된 휘오데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시작 단계인 거듭남은 물론 그 이상의 전진된 단계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예정의 내용으로서의 휘오데시아

    신약에서 <예정하다>(프로오리존, 4309)라는 말은 행4:28, 고전2:7, 1:11, 1:5, 8:29-30 등에서 쓰였으나 우리가 현재 살펴 보고 있는 엡1:5에 상응하는 문맥은 로마서 8:29입니다. 두 단락을 이곳에 인용 소개해 보겠습니다.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having predestinated us unto the adoption of children, KJV)(1: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did predestinate <I>to be</I>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KJV)( 8:29).

 

원칙적으 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따라 예정하신 궁극적인 내용이 각기 다른 둘 일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단순하게 보더라도 엡1:5에서 예정된 내용은 롬 8:29에서 예정된 그것과 같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자녀로서 입양” 된 것은 곧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단지 거듭남 만이 아닌,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듭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입니다(갈4:19).

 

우리는 엡1:5에서 쓰인 ‘unto ‘ (ε??, 1519)가 많은 때 지향하는 어떤 것의 최종 결과(result) 또는 목적(purpose)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도 휘오데시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흠이 없고 거룩케 하신최종 결과를 가리키는 말임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후크마의 말을 빌려 보겠습니다. 그는 요한일서 3장 2절의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을 주석하는 문맥에서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아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온전히 닮는 것이 우리의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이다.”(위 책, 59)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롬8:29에서 우리에게 예정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과도 상통하는 개념입니다.

 

4. 결론

     1:4-5가 말하는 창세 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서의 휘오데시아는 그 당시 로마 시대 언어습관, 같은 단어가 쓰인 갈4:4-5 문맥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의 내용을 말하는 또 다른 곳인 롬8:29의 본문에 비춰 볼 때, 다만 구속이나 거듭남의 개념만이 아닙니다. 대 신에 거기서 더 전진하여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갖는 단계까지를 포함한 의미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엡1:5의 휘오데시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에 따른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설정과도 맞물린 매우 엄중한 문제입니다.

(퍼온글 - 김바울형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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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E. 바버 자매님의 전기


교회사순례 2011-03-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840.html

마가렛 E. 바버 자매님의 전기


서 문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욱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 10:10). 그분의 부활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양들을 먹이시려 그의 제자들을 보내셨는데(요 21:15 17), 이 역시 그러한 생명의 원칙에서 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본을 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말들을 단순히 가르침만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더욱이 교회에 대한 음식으로(고전 3:2) 그리고 그의 동역자들에 대한 음식으로 여겼습니다(딤전 4:6).


그러나 생명이 갖고 있는 완전한 잠재력에 이르려면 생명은 훈련과 다루심 받음을 필요로 합니다. 기대하는 것이 높을수록 더 많은 훈련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의 양들을 먹일 뿐 아니라 목양하라고 명했습니다(요 21:16).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서 의의 평강의 열매가 나오도록 하기 위해 다루심을 사용하시며(히 12:7, 11), 그분은 우리들을 교정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호흡해 내십니다(딤후 3:16).


우리는 이 소책자에서 주님의 종, 중국에서 하나의 신성한 생명의 씨앗이 된 마가렛 E. 바버 자매님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그녀는 생명의 공과를 배웠는데, 이 배움은 그녀가 젊은 믿는이들을 본으로써 훈련시키는 동안, 세밀한 순종함으로 어린양을 따르도록 자기 자신을 엄격히 다룸으로써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녀는 신실한 청지기가 되었으며 그녀의 배움을 훗날 유능한 선생들이 된 신실한 이들에게 부어 주었습니다(딤후 2:2). 아마도 그녀의 훈련하는 손길아래 있었던 이들 중 가장 눈길을 끈 이는 워치만 니 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권익을 위해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사하려는 부담을 가짐에 있어서 바버 자매님은 십자가를 깊이 체험했으며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녀의 시들은, 이 책에도 몇 편이 실렸지만, 그녀의 그리스도의 깊은 체험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주님의 임재안에 깊이 있었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열망했습니다.


그녀는 중국에서 여행을 거의 하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을 사지 않는 가운데 후조우시 외곽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기도했으며 주님을 추구하기 위해 그녀의 조언을 구하는 이들을 도왔습니다. 바버 자매님을 통해 워치만 니는 그의 영적인 삶의 기초를 얻었습니다. 젊은 니 형제님이 유창함, 지식, 능력, 열심 혹은 천연적인 설득의 능력을 가진 크리스챤 연사를 존경하고 있을 때 바버 자매님은 그러한 것들이 그 영이나 생명에 속한 것들이 아님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생명을 사역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일 보다는 생명에 더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영적인 삶에 파선함을 몰고 오는 인기 있는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젊은 형제들을 경고했습니다. 워치만 니 형제님은 자신을 굳이 바버 자매님의 지시와 엄한 꾸중아래 둠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윗트니스 리 형제님이 쓴 워치만 니의 전기에서(워치만 니: 현재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애나하임: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1991, 18), 리 형제님은 워치만 니가 도라 유와 마가렛 바버로부터 받은 도움에 관해 말합니다: "니 형제님은 자주 우리에게 그가 구원받은 것은 자매(도라 유)를 통해서 였고, 그가 양육 받은 것도 자매(마가렛 바버)를 통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워치만 니를 디 엠 팬튼, 로버트 고벹, G.H. 펨버, 제시 펜-루이스, 티 오스틴-스팍스의 글들에 소개한 사람도 마가렛 바버였습니다.

이 소책자를 위해 우리는 바버 자매님의 전기와 함께 그녀의 시와 편지들 그리고 그녀가 주님께로 갔을 때 그녀를 기념했던 말들 일부를 함께 모아 놓았습니다. 전기 부분은 저자를 알 수 없는 중국 본토에서 찾은 원작으로부터 번역한 것입니다. 어떤 부분들은 교정하고 편집했습니다. 시편들은 '새벽(The Dawn )'잡지(디 엠 펜튼 편집), '이기는 자'(제시 펜- 루이스 편집), '증언과 간증(티 오스틴-스팍스)의 글들로부터 모았습니다. 다른 22편의 시편들은 찬송가(리빙스트림 간행 - 애나하임, 캘리포니아)에서 찾았습니다.

편자는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현 시대에서 주님의 목적을 완수함에 있어서 그분의 자녀들을 지시하기 위해 주님이 이 책을 쓰시기 원합니다.


한 증인의 이야기

M. E. 바버 자매의 이야기

1 부

"무명한 자요"("As Unknown) (고후 6:9)


M. E. 바버는 일반적인 세상 뿐 아니라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막 안의 흐름들"이라는 책 안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함을 알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아마 알려진 전부일 것입니다. 그녀는 영국인이었으나 영국 인물 사전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선교사 였지만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이 위대한 일들을 한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한 일의 범위는 넓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일의 대부분은 중국의 작은 구석진 알려지지 않은 마을로 제한되었습니다. "전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요한 웨슬레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찬송가들을 썼지만 찰스 웨슬레나 대부분의 크리스챤 찬송가 책들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아이삭 왓츠의 찬송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사랑했으며 영적인 삶에 있어 성숙했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많은 글들을 남긴 앤드류 머레이나 마담 귀용 같은 이들과도 달랐습니다.


그녀는 마치 이 땅위에 조용히 왔다가 간 외로운 여행자 같았습니다. 그녀는 1866년에 영국의 피젠홀, 써폴크 카운티에서 루이와 마르다 바버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M. E. 바버가 63세 되었을 때 데려 가셨습니다. 그녀의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주님에 의해 두 번 중국에 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집을 포기하고 수천마일 떨어진 낙후된 나라로 외롭게 여행했습니다. 그녀는 1930년 3월 1일 그녀가 죽기까지 그녀가 신실하게 계속했던, 주님을 위해 바친 그녀의 최고의 해들을 후조우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보냈습니다. 한 형제님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막14:8)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워치만 니 형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의 유명한 책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녀에 대한 그의 감사함을 후에 썼습니다. 마지막 장 '복음의 목표'에서 ("왜 이 허비를?" 이라는 제목으로 별도 인쇄됨) 니 형제님은 그녀의 "주여, 주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제 마음은 부숴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를 인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라고 그녀에게 물었는데, 그녀는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많은 중국인 젊은이들 중 일부는 그녀로 인해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왜 더 큰 도시로 가서 집회를 세우고 일하지 않습니까?"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그녀가 그곳에서 사는 것이 허비인 듯 했습니다. 한 형제는 그녀에게 "아무도 당신이 아는 것처럼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가장 산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방에 필요가 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나가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기서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 힘,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다시피 말했습니다.


허비였을까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중국에 하나님에 의해 심겨진 바 된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이 씨앗은 정녕 외로움, 수치 당함, 은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함은 그분은 그녀로 활짝 피어 열매 맺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놀라운 일은 바로 이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녀로 풍성히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던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이 사실을 알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2 부

"향유 냄새가 가득하더라" (요 12:3)


바버 자매님은 50년 이상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 가운데 그녀에게서 직접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한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녀가 우리에게 준 깊은 인상을 희석시키지 못합니다. 나이 많은 자매님 한 분은 젊은 시절 바버 자매님을 본 것을 기억했는데:


그녀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동그란 얼굴을 가졌는데, 그 얼굴은 친절하고, 무게 있고, 경건하며 깨어 있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빛으로 충만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 있을 때 항상 사람들로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말할 때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그녀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이것은 사람들로 인생의 고통을 잊게 해 주곤 했습니다. 그녀는 후조우 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주위 사람들에게 준 영적인 공급에 관해 위의 자매님은 "그녀가 해방하는 말씀은 빛과 생명이 가득했으며 사람으로 모든 것을 떠나 일생동안 주님을 따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또 다른 나이 드신 형제님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학생이었는데 후에 그녀의 영적인 아들이 되었고 또한 바버 자매님의 동역자이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이 기억했습니다:


제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눈빛은 번개같았고 머리결은 은같이 빛나고 얼굴은 마치 천사 같이 빛났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어머니의 표정같이 온화했습니다. 그녀의 행동함은 경건했으며 옷은 소박했고 언제나 미소 띠고 친절했습니다. 그녀는 중국에 온 여느 외국인들과 달랐습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깨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판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본이었습니다. 그녀가 행한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워치만 니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나이 든 자매님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 자매님이 바버 자매였습니다. 그녀가 주님께로 갔을 때, 니 형제님은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의견으로는 그녀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었으며 그녀가 주님과 나눈 교통과 그녀가 주님께 드린 신실함은 이 땅에서 거의 찾기 힘든 것들입니다." 니 형제님은 사역할 때 그리고 개인적인 교통 안에서 자주 그녀를 말하곤 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내 일생동안, 그녀가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내 인생의 가장 큰 얻음은 바로 바버 자매님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1933년 영국과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디 엠 펜튼, 죠지 커팅, 제임즈 테일러, 티 오스틴-스팍스 등의 유명한 크리스챤 인도자들을 만난 후 니 형제님은 "바버 자매님과 비교 할 만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1933년에 니 형제님이 동역자들과 섬김에 관해 말했을 때 "만일 바버 자매님이 여기 계셨다면 우리의 상황은 달랐을 것"이라고 그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를 빛나는 크리스챤으로 여겼습니다. 니 형제님이 그녀가 사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니 형제님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 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로 그의 마음에 결심했었는데 따라서 그는 자신을 이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버 자매를 만나 주님에 관해 말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면 그는 항상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에 있어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파고다 앵커리지에 사실 때, 그녀는 항상 주님을 위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말함을 통해 그분의 뜻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그녀의 인격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니 형제님이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성결하게 됨에 관해 말함을 듣고 성결의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결과 관련된 200여 구절들을 찾았습니다. 그 구절들을 외우고 순서대로 배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결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나이 드신 자매님을 만난 날까지 안으로부터 공허했습니다. 그녀는 신성했습니다. 그날 내 눈이 열렸습니다. 성결케 됨이 어떤 것인지 본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 인격은 신성했습니다. 내게 이것이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빛이 나로 더 앞으로 나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나는 피할 수 없었는데 이 빛이 성결을 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1922년, 바버 자매님은 56세였습니다. 니 형제님이 아직 젊을 때 였는데 구원 받은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가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만질 수 있는 많은 청사진들, 기발한 생각들, 훌륭한 계획들로 가득 했습니다. 그는 그의 이러한 것들이 실행에 옮겨만 지면 놀라울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아주 흥분되어 이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해 바버 자매님을 설득키 위해 갔습니다. 후에 그는 "내 계획들에 관해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몇 마디 무게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 때 빛이 임했고 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내 일은 아주 천연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요소들만으로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빛이 옴으로써 나는 주님께 단지 주님! 내 생각은 단지 육체의 활동에만 주의 할 뿐입니다. 여기 그러한 것들은 생각조차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동기와 소망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태까지 이끌려졌습니다.


그녀의 글들 가운데,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원합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기도였습니다. 여기의 단어들은 어느 유명한 한 나라의 지도자의 전기에서 인용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가 말하길, "내 자신을 위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내 조국을 위한 모든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후에 워치만 니는 이 인상적인 기도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녀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이 기도가 바버 자매님의 일생을 정확히 나타내고 설명해 줍니다.

3 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히 11:9)


바버 자매님은 1899년에 처음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후조우, 푸킨 이라는 도시에 보내졌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태수여자고등학교(이 학교는 영국 교회에 의해서 시작되고 운영되었음)에서 7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충만한 그리스도의 넘치는 생명으로 탁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좋아하고 그녀의 가르침을 원했습니다. 이것이 교장의 질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교장은 그녀에게 불법적인 일들로 공격했습니다. 그녀가 자세하게 조사 받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주님 앞에서 "만약에 엄지손가락이 작은 손가락과 다툼을 하면 그것은 머리만 아프게 하기 때문에 내가 학교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주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조용하게 태수여자고등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죄목"들이 영국 선교회 본사로 전달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십자가의 그림자 안에서 침묵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오해받아 고통 당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계속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그 사역의 책임 형제가 이런 말을 할 때까지 피했습니다. " 나의 권위로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기를 중국에서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아무 것도 숨기지 마십시오." 그랬을 때 비로소 그녀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습니다.


그녀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그리스도인 매거진, 새벽(The Dawn)의 편집자인 디 엠 팬튼(D.M. Panton)형제님과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파에 관해서 뚜렷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경의 예언과 이기는 자의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는 그녀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도록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 2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에 그녀는 믿음을 사용함으로 주님께서 그녀로 중국으로 돌아가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디 엠 팬튼(D.M. Panton) 형제님과 노르윅에 있던 써레이 채플(Surrey Chapl, Norwich - 그가 사역했던 곳)과 교통하던 그녀는 마침내 1909년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그녀를 도울 만한 큰 선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녀보다 20살이 아래인 그녀의 조카, 미스 벌로드(Ballord)가 함께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미스 벌로드(Ballord)는 적은 적금이 있었지만 미스 바버는 시편 23편에 있는 주님만이 그녀의 공급이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녀는 주님께서 그녀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그녀가 갈 곳을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배가 중국 민 강을 건널 때, 그녀의 필요와 그녀의 장래를 위해 그녀는 단지 조용히 주님을 앙망 했습니다. 아름다운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에 왔을 때 이곳이 그녀가 일할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임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에 있는 집을 빌리고 그곳에서 주님에게 돌아갈 때까지 살았습니다. 집주인은 시야라는 자매로 고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는 바다 근처에 있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미스 바버는 단촐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좋은 집에 살던 것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후조우에서 그녀의 집으로 가려면 증기선을 타고 메이위에 가서 그리고 작은 배로 근처 마을까지 간 다음,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 어떤 오래된 나무 집들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 중 한 집에 그녀의 침실이 있었고 거기서 그녀는 주님과 교통했습니다. 다른 집들은 손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는 미스 바버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의 가나안 같았습니다. 이곳이 그녀의 "약속의 땅" 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땅을 가져가 버리시지는 않을는지? 미스 바버가 그곳에 어느 정도 살고 난 다음, 집주인이 고아원으로 사용키 위해 미스 바버가 쓰던 집들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녀는(집주인) 미스 바버가 이사하길 원했고 그녀는 집을 고치려고 일꾼을 보냈습니다. 언뜻 보기엔 이것이 미스 바버의 그곳에서의 마지막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이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저버리지 않음을 믿었습니다. 확신으로 그녀가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아버지여 내가 비오니 당신이 당신의 약속을 견고하게 하옵소서." 결국 집주인은 어떤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고친 집들은 그녀가 살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1930년 주님에게 돌아갈 때까지 살았습니다. 미스 벌로드(Ballord)는 지속적으로 1950년 즉, 그녀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 갈 때까지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에서 사역했습니다.

4부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히 6:15)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는 주님으로부터 준비되었지만, 자주 " 하나님은 항상 푸른 하늘을 약속하지 않으심 "(Hymns #720)을 알게 됩니다. 어느 날 사방으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낙심하였고 소망이 없게 되었지만, 주님은 그녀와 함께 서 계심으로 그녀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인하여 그녀는 아래의 시를 썼습니다. (Hymn #662)


푯대 향해 가라 외로울지라도 주 널 부르고 있으니 곧 전진하여라
푯대 향해 가라 주 너를 보신다. 내 기쁨 모든 슬픔을 주께서 돌본다.
푯대 향해 가라 뒤보지 말고서 내 앞에 상 있으니 면류관 주시리라.
푯대 향해 가라 귀 막고 묵묵히 주 가신 십자가 길을 주 따라 가거라.

이 찬송시에 표현 된 외로움과 고난을 통해, 그녀의 한 동역자의 회상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번창하는 산의 도시, 휴이첸으로부터 그녀는 낮선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이사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조용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금전적인 공급이 없었고 그녀는 단순히 주님이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당시에 후조우에 사는 서양 선교사들이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 "파고다 앵커리지에 미스 바버가 살고 있고.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또한 많은 때에 그녀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란다." 한 선교사 자매가 어떤 상황인지 알기 위하여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그녀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에 미스 바버는 떡과 우유로 강아지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이 자매가 말하기를 "당신에 관한 소문들은 거짓말들이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아주 놀라운 은혜를 주고 계시는군요." 미스 바버가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 주님을 찬양합니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금전적인 어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돈을 내야할 때에 그녀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 현대주의자가 그녀에게 와서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에 대하여 "미신적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그녀가 돈이 몹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님이 그녀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뢰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녀는 디 엠 팬튼(D.M.Panton - Norwich, England)형제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왜 그가 많은 돈을 보냈는지 편지로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답하기를 그녀가 필요할 때에 그는 그녀의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기도하는 도중에 그는 돈을 보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미스 바버는 영적인 원칙들을 지켰습니다. 그녀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줍는 유대인처럼 또 그릿(Cherith - 왕상 17:3)) 시냇가에서 하나님이 까마귀로 떡과 고기로 너를 먹이라고 명하심을 기다리는 엘리야처럼 살기 원했습니다. 하루는 두 형제가 바다 건너서 미스 바버와 그녀의 동역자를 방문하러 왔습니다. 이 형제들은 동역자들의 삶과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표했고, 권하기를 동역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사업을 하고, 예를 들어서 그들에게 중국 녹차와 자수를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권했습니다. 그들이 차를 팔아 이윤을 남겨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쓰자고 했지만 미스 바버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원칙을 지켰습니다.


5 부

"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하박국 3:2)


미스 바버는 신실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그녀의 필요뿐만 아니라 그 사역에 필요한 것도 공급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와 미스 벌로드(Ballord)는 그들이 육체 안에서 얼마나 제한되었는지 깊이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저 여자 둘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선교회의 후원이 없는 약한 자매들이었지만 그들의 영적 통찰력에 있어서는 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중국이 광대하고 이상하여도 주님께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머나 먼 꿈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젊은 사람들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 세우실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것을 위하여 그들은 10년 이상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는 가까운 곳에 큰 부흥이 있었고 하나님이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 젊은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들 중에는 리넨왕, 리진왕, 페이스풀 룩(Faithful Luke), 지싱첸, 신젱첸 그리고 워치만 니 등이 있었으며, 자매들은 순생지, 신징성 그리고 리윤린 들이 있습니다. 이 자매들은 미스 바버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그녀와 함께 살고 일하기 위하여 이사했습니다. 지 자매는 그녀의 직장인 선생직을 포기하고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미스 바버의 임종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미스 바버를 데리고 가셨을 때 그녀를 기리는 뜻에서 송 자매는 주님의 인도로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이사하여 주께로 갈 때까지 지 자매와 같이 있었습니다.

많은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미스 바버는 손님 접대를 목적으로 그녀의 집 근처에 여러 채의 집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중 한 집은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집회는 양육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일 주 혹은 이 주 동안 그녀는 학생들과 갈망하는 젊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의 기억에 따르면 집회 중에 매일 세 번의 성경공부가 있었습니다. 집회 후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노트와 그들의 시를 복습하고 다른 숙제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집회뿐만 아니라 진리 수업들이 근처 마을에 사는 복음에 굶주려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이 수업들로 복음 진리 즉, 하나님의 존재, 사람의 죄, 심판 그리고 주님의 구원이 체계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어떻게 미스 바버는 훈련을 통해 사람들을 세우는 사역을 감당 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기증을 의존하지 않고 또한 광고나 탄탄한 재정적인 지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주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을 신뢰했습니다.


한번은 의사 마이크(Dr Mike)형제가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강을 건너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미스 바버와 연결된 많은 동역자들을 보기 위해 왔습니다. 그는 많이 기뻤고 그가 본 것에 대하여 상당히 인상을 받았습니다. 동역자들이 정해진 보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어려우리라고 느꼈습니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 당신들의 모임에 이름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의 나라로 돌아가서 나의 선교회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돈을 걱정하지 않고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지만 미스 바버는 고집스럽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믿음의 길은 참으로 외로운 길입니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우리는 한 나이 든 자매님의 회고로부터 약간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많은 나이를 인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그녀를 바버 이모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늙든지 젊든지 우리는 다 똑 같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나이로 인한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다만 나를 바버 자매로 부르세요." 그 때부터 모든 노 자매들을 " 자매 "로 불렀습니다.


자매들에 대한 그녀의 가르침은 자매들이 진지하고 조용하고 순종적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데살로니가 전서와 디모데 전서를 언급하면서 이 두 책들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이것은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녀는 자매들에게 진리와 권위에 순종하기를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녀는 자매들에게 말을 적게 할 것을 권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을 배우고, 듣는 이들에게 해만 끼치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의 논쟁을 피할 것을 권면 했습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녀는 워치만 니, 캉 시위, 그리고 페이스풀 룩(Faithful Luke) - 이들을 그녀의 진정한 믿음의 자녀로 돌보았습니다. 그들 또한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평생동안 주님을 섬기도록 만져 진 바 되었습니다.

6 부

"은쟁반에 금사과" (잠언 25:11)


1922년쯤 매주 토요일 1년 동안 니형제님은 도움을 받기 위해 바버 자매님을 방문했습니다. 주님이 니형제님과 함께 양육한 몇몇 형제들도 도움을 얻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형제들은 가기를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자매님의 심한 꾸지람 때문이었습니다. 자매님의 꾸지람이 그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는 그러한 자매님의 다루심이 합당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루심을 받은 후 모든 형제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때쯤 후조우에서는 일곱 명의 형제들이 교회의 일에 관한 교통을 위해 매주 금요일마다 모였는데 많은 때 대부분을 니 형제님과 다른 책임 형제님과의 말다툼으로 보냈습니다. 이 책임 형제님은 니 형제님보다 다섯 살 위였습니다.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고 상대방의 생각을 비난하길 좋아했습니다. 가끔 니 형제님이 흥분했고 사과 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니 형제님은 바버 자매님을 찾아 가 불평하고 자매님의 판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바버 자매님은 니 형제님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한테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그에게 복종하십시오,"

니 형제님은 복종하기 싫어했고 말했습니다. "당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합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바버 자매님은 "합당하든 안하든 형제가 상관 할바 아닙니다. 성경은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책임 형제와의 일이 있은 후 이틀 동안 울었고 바버 자매님의 말을 들은 후 속이 상해서 또 다시 울었습니다. 그는 조금 일찍 태어났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가 자기한테 복종하길 바랬습니다. 니 형제님보다 나이 많던 형제님이 나이가 더 많은 형제님에게 복종치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니 형제님은 자기가 확실하게 옳고 다른 동역 형제가 틀렸다고 느꼈습니다. 이번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버 자매님에게 갔을 때 자매님은 말했습니다. "동역 형제님이 옳고 틀리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형제님이 제 앞에서 다른 형제님을 비난하면서 당신이 십자가를 진자 같습니까? 어린양과 같습니까?"

후에 니 형제님은 간증하기를 "이것이 자매님이 한 모든 말이었습니다. 난 무척

창피했습니다. 그해 난 내 생애에 가장 중요한 공과를 배웠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 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니 형제님이 좋은 찬송시 몇 곡을 하루 밤 동안 썼습니다. 그는 칭찬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바버 자매님은 "젖과 꿀 같은 찬송시는 공과를 배우고 경험한 생명의 넘쳐흐름입니다. 이러한 것은 한날 하룻밤에 생길 수가 없습니다."라고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니 형제님이 주님을 섬기기로 마음먹은 후 바버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은 질문하기를 "주님을 섬긴다구요? 주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니 형제님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자매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그 분을 섬기기를 원치 않는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형제님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내가 무언가를 하길 원하십니다." 자매는 떡의 부서짐에 관한 마태복음 15장을 읽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니 형제님은 대답했습니다. " 먼저 주님 손에 있던 떡과 생선을 취하시고 축복하신 후 떡과 생선은 증가돼서 사천 명을 먹였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심각한 목소리로 "주님 손에 가지고 계셨던 모든 떡은 부서지고 주님에 의해 나누어진바 되었습니다. 부서지지 않은 떡은 다른 이들에게 먹게 할 수 없습니다. 형제여 기억하십시오. 많은 때 나는 마치 떡이 이야기하듯 주여, 난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내 마음에서는 아직도 희망을 갖고 있는데 "주님 비록 내가 내자신을 당신께 드려도 날 부수지 마십시오." "우린 항상 부서지지 않은 떡덩어리로 드려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쥐어진 어떠한 떡도 안 부서지고 남은 것은 없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가끔 사람들이 필요한 말씀을 만지므로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한번은 나이 많은 자매가 주님께 복종하는 것에 관해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바버 자매님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자매에게 경고했습니다. " 만약 사탄이 공격할 때, 당신은 주님 안에서 견고히 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탄의 미소를 조심하세요. 항복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한번은 바버 자매님이 도라 유 자매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만약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점령한다면 그는 이미 우리의 생명을 주관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땐 단지 감기일지라도 자매님은 항상 질문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주님의 종 첸형제는 바버 자매님의 말을 들음으로 도움을 받았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자매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공과를 가르쳐 주었고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날 격려했습니다." 자매님은 가끔 말했습니다 - "걱정 말고 단지 믿으세요" - "난 이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번은 한 젊은 형제와 기도하는 중에 자매님은 주님을 섬기는 또는 성전을 섬기는 것에 관한 에스겔서 44 장을 읽었습니다. "젊은 형제여 내가 20 년 전 이 장을 읽었을 때 난 즉각 성경을 덮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로 성전이 아닌 당신을 섬기게 해 주세요."

자매님이 젊은 형제에게 준 도움은 많은 집회와 메시지보다 더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후에 이것은 가장 효과적이고 영구적인 도움이 됨을 증명했습니다.




7 부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 10:15)


비록 바버 자매님이 사람을 어떻게 온전케 하는 줄 아는 좋은 선생으로 알려졌지만, 자매님은 또한 복음 전하는 의무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파고다 앵커리지에서 약 10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미스터 리 집 부엌에서 바버 자매님은 떠듬거리는 후조우 방언으로 리 가족과 다른 친구들에게 자주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엔 자매님이 중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매님은 후조우 방언을 가르쳐 줄 이 목사님을 앵글리칸 교에서 고용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매님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매님은 영혼을 구원하길 원했기 때문에 이 목사님과 함께 리인칭 도에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주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피터 로안이라 하는 젊은 형제가 주님을 믿었고 나이 많은 자매님들이 주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어떤 이는 그들의 생애를 주님께 바치고 바버 자매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몇 년후 믿는이들이 증가했고 자매님은 찬퉁과 리 안칭 도에서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자매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영적인 면에서만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자매님은 교회 행정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수 년 동안의 많은 수고로 동역자들의 수 또한 점점 증가했습니다. 동역자들은 바버 자매님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난 후, 찬퉁과 민아워 도에서 일했습니다. 그 당시 딩 자매, 에이 자매, 첸 자매 그리고 이 자매가 일하는데 합세했고 전시간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부지런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그 분의 밭으로 가져감에 있어 신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그녀는 멸시 당하고 모욕당했지만 자매님은 주님과 복음 그리고 사람들의 혼들을 위해 받는 그녀의 고난을 즐거워했습니다. 자매님은 실망치 않고 낙담치 않았습니다. 수고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십 년을 마치 하루 같이 낙심치 않았습니다.


영적인 원칙을 지킴에 있어서 바버 자매님은 자신한테 곧을 뿐이니라 동역자들한테도 그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 전파하러 갔을 때 그들은 이방인들한테서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요한 3서 7장). 자매님은 동역자들에게 기도와 복음 전파에 집중한 열 두 사도를 따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막을 만드는 두 면을 가진 생활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자매님은 사교적인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했습니다. 자매님의 동역자들이 다른 배경을 가졌더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가 되길 격려했습니다. 동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세상 적인 것과 죄로부터 분별됨으로써 거룩케 되고 주님이 쓰실 수 있는 합당한 그릇이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매님은 중국인 신년을 기념하지 않았고 세상 적인 풍습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들 가운데 남자와 여자 사이를 확실하고 정확하게 분별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약간의 대화가 있어도 대부분 그들이 기도할 때였습니다. 한 동역자는 15살 여학생과 함께 물을 날라 준 후 바버 자매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일보다 기도에 더 중점을 두었고 동역자들과 매달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하는 일이 지속되고 자연스럽게 발전되길 위해 기도하곤 했습니다.


자매님은 비록 동역자들에게 상당히 엄격했을지라도 사랑과 배려가 넘쳤습니다. 왕 자매님이 80살 때 주님이 부른 때를 회상했는데, 50년 전 그녀는 믿음으로 살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교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처음 파고다 앵커리지에 와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했을 때 바버 자매님이 그녀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습니다. 액수는 적었지만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받은 기억이 가슴에 너무도 생생해서,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8 부

" 예, 아버지" (마태 11:26)


왜 주님은 바버 자매를 그렇게 많이 쓰셨을까요? 그녀의 사역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확실히 그녀의 사역과 삶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니 형제님이 후에 설명했습니다. "주님의 일은 생명이 밖으로 흘러 나옴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당신 안에서 일하시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그녀를 변화시키고 일 할 수 있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은 주님을 향하여 살고 사랑할 맘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어려운 환경에 당면했는데, 그 환경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댓가로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 환경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들고 말했습니다. " 주님! 당신의 맘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 제 맘을 기꺼이 부수시기 원합니다."

다른 때 니 형제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복종했던 자매님의 경험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 하나님이 그 분의 뜻을 내게 말하길 늦추실 땐 언제나 내게 아직 복종치 않는 마음과 합당치 않은 동기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이러한 것을 많고 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자매님은 니 형제님에게 묻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십니까?" 그녀는 "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십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바버 자매님이 어떤 문제에 관해 주님과 변론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진정으로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니 형제님은 자매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주님 난 이번 공과를 배우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발 제게 항복하지 마세요. 주님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께 항복할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이 자매님께 항복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세상을 떠난 후 몇 개월 후 누군가 니 형제님에게 그녀가 갖고 있었던 상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글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주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란 계명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녀는 "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비밀은 95%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문제이고 단지 5%가 이해하는 문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알고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던 사람임을 자신이 증명했습니다.


한번은 니 형제님이 이 질문을 가지고 자매님께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로부터 제자들이 주님께 요구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까?" 니 형제님은 주님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버 자매는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우리는 사람들의 밖의 실수를 보지만 주님은 그들의 숨은 승리를 보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주님한테서 거듭된 공과를 통해서 배웠음이 분명했습니다. 자매님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대적을 거절함에 있어 그렇게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매님이 나흘동안 아팠습니다. 동역자도 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요리사도 자기 집에 갔습니다. 자매님은 왜 자매님이 아파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고 사탄으로부터의 공격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자매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만약 제게 잘못이 있으면 이 질병을 계속 지속시키십시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탄의 공격이면 전 계속해서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자매님은 이미 나흘동안 고열로 고생했었지만 즉시 일어나 이렇게 시작하는 찬송을 썼습니다. " 대적에게 내 할말은 언제나 '아니다' " 이 찬송을 쓰고 난 후 자매님은 일하러 갔습니다. 아픔은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질병을 통해서만 자매님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은 다른 많은 환경을 주심으로써 자매님이 항상 아버지께 "예" 하는지 안하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9 부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 (엡1:17)


바버 자매님은 주님 안에서 깊고 풍성했는데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체험 모두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첸 채셍 형제님은 바버 자매님의 동역자로 파고다 앵커리지에 살았었는데 다음과 같이 바버 자매님의 진리에 관한 이해를 요약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호흡하심이며 가르침, 신념, 교정과 의로움 안에 있는 교훈을 위해 유익함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쪼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로 진리를 알도록 이끌어 주었으며 선과 악을 분별하며 정직하고 성실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교회 안으로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현혹하는 사악한 영에 대항해 싸웠으며 성도들로 서로 서로 권면하고 기도하며 마귀의 속임수를 저항해 설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우리들로 먼저 그분의 왕국과 의를 추구하며 왕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격려하며 왕국의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의 진리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바 되었으며 그분과 함께 부활했음을 --전파하며 우리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들로 여기도록 권면 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그녀는 우리들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이 되도록, 그리스도의 군인이 되도록 그리고 고난을 통해 영광 안으로 우리들의 대장을 따라 가도록 권면하며 이김에 관한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들이 우리의 달란트를 묻어둠으로 미련한 처녀들이나 사악하고 게으른 종들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파했습니다(마 25:1-2,26).


그녀의 주관적인 영적인 체험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들은 그녀가 배운 믿음의 공과들과 그녀가 걸어 간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첸 채셍 형제님은 이러한 체험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건강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젊음 또한 유지했습니다. 그녀의 신선함은 모세와도 같았고 그녀의 신체적 강건함은 갈렙과도 같았습니다. 그녀의 전 생애 동안 중병을 앓은 적이 없었으며 단지 가벼운 병들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이적과 표적들이 우리를 따라옴을 믿음으로 하나님에 의한 치유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동역자들도 그들이 병에 걸렸을 때 의사에게 가거나 약을 쓰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질병은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간증키 위해 하나님에 의해 치유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매일의 생활에서, 바버 자매님은 아주 작은 것들 심지어는 머리핀 한 개나 비누 한 개 얻는 것조차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주의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녀의 머리결은 금발이었는데 중국에서 만든 검은 색 머리핀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것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외국으로부터 금발 머리핀을 받았습니다.


세 딸과 한 아들을 가진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 류 여지라는 딸 하나를 라이 집안의 하녀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류양은 매우 아름다웠는데 라이 가문의 한 사람이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 모녀가 이 소식을 들음으로 슬피 통곡했는데 그것은 이 백 사십불을 지불하지 않으면 라이 가문이 그 딸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이 문제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애정 어린 마음은 류 자매가 첩이 되게 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이 모녀는 구원받았었습니다.) 그녀는 이 모녀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당시 바버 자매님은 돈이 없었으므로 그녀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몸값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후에 주 형제와 결혼하게 된 류 여지 자매의 몸값을 지불토록 외국으로부터 이 백 사십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연로한 아브라함처럼, 바버 자매님은 주님의 손길로부터 온 이삭을 받기를 배웠을 뿐 아니라 그녀는 그 이삭을 주님의 손에 돌려 드리는 것을 또한 배웠습니다. 그녀는 황혼기에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키 위해 털 코트 갖기를 바랬습니다. 그녀는 기도했고 주님은 미국에 있던 한 믿는 이를 만지심으로 그녀에게 털 코트를 보내게 했습니다. 그 코트를 입고 있던 어느 날 이렇게 말하는 한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버 자매님, 당신은 동역자이십니다. 어찌 그렇게 좋은 털 코트를 입으실 수 있습니까?" 바버 자매님은 이 말을 듣자 그 코트를 포기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 코트를 다시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 코트가 다른 사람을 걸리게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입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롬1:17)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식물과 같습니다. 다음의 소중한 이야기는 바버 자매님의 믿음이 자라기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성숙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한 때 바버 자매님은 하나님께서 그녀로 접대를 위해 열 개의 방이나 아파트를 더 준비 할 것을 명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기술학교를 폐교하도록 안배하심으로 그 건물이 그녀에게 다시 빌려지도록 했습니다. 4년후 그 학교는 다시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워치만 니 형제님의 아버지께서 그 학교 위원회 이사였습니다. 니 형제님은 개교 소식을 듣자 곧 바버 자매님을 찾아가 그녀가 그 소식을 들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가을 학기부터 다시 개교한다고 이미 통지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미국으로부터 두명의 기술자들이 고용되어 오는 중이었습니다. 학교측 인사들에 따르면 그것은 이미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가 이사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우리는 이사 안 할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가 기도했는지 물어 보았는데 그녀는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기도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그녀에게 그녀가 사탄에게 속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기다려 봅시다." 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가 어찌 그리 자신이 있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은 우리와 농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 건물을 빌리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는 행했습니다. 그분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어찌 우리를 몰아 내시겠습니까?" 그 후 그녀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쿨링(후에 니 형제님의 훈련센터가 된 곳)에서 여름 휴가를 평강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녀가 휴가 후 돌아 올 무렵 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 편지는 그 학교가 파산 신고를 하게 됨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없으므로 그녀에게 그 건물을 다시 빌릴 것을 요청했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당시 매우 젊었던 니 형제님에게 많은 영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은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 어떤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는데, 일례로 자매들이 신언하는 것에 관해 두 분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버 자매님의 조카인 이 자매님은 후에 두 분이 이 문제로 결코 논쟁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니 형제님이 파고다 앵커리지에 가끔 왔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니 형제님이 말씀하실 수 있도록 관대하게 연단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녀 자신은 앉아서 조용히 들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얼마나 깊이 그녀 안에서 역사하셨는지 보여 줍니다. 다른 이들의 장점을 기억하며 그들의 다른 견해를 인내하는 것은 자아 없는 생명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젊은 니 형제님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 팬튼 형제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아는 것의 문제 일 뿐 아니라 또 기다림의 문제입니다. 그녀는 진실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산 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에 관해 그녀가 쓴 많은 찬송 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1925년의 마지막 밤, 니 형제님과 바버 자매님은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 당신께선 정말로 1925년을 그냥 지나가게 하실 건가요?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께서 오늘 오시기를 요청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달 후 니 형제님이 그녀를 길에서 만났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니 형제님 손을 붙잡고 "참 이상해요. 왜 그분께서 오늘이 되도록 아직 오시지 않는지요? 내년이 오기 전까지는 오실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니 형제님과 그 길을 걸으며 그녀는 다음 모퉁이를 돌면 그들이 그분을 만나게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술람미 여인같이 그녀는 온 생애동안 주님에 의해 이끌려 졌습니다. 또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가서 1장 4절에 있는 것처럼 이끌려진 이는 술람미이지만 "우리들도"--많은 처녀들도--"당신을 따라 달려갑니다."


10 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딤후 4:7)


바버 자매님은 믿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아플 때 그녀는 의사에게 가거나 약을 먹거나 주사 맞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 2월 그녀는 장티푸스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녀의 조카 이 자매님도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룸메이트였던 이 무셰 자매님께 고열로 인해 마사지를 부탁했습니다. 열이 좀 내린 후 그녀는 그녀의 동역자들을 위해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쵸우 자매님이 그녀에게 "바버 자매님,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때에 왜 우리만을 위해 기도하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동역자들이 항상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부담이 있는데 그래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며칠 더 앓은 후에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떠나기 직전 "생명, 생명!"이라고 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임종시 그녀에게는 단지 몇백 불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 후에는 단지 십이불만 남았습니다. 그녀는 진정 그녀의 보물을 하늘에 쌓았습니다. 그녀의 죽음 소식에 많은 동역자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어쩔 줄 모르고 울었습니다. 첸 청신 형제는 "이제 나를 사랑해 주고 교정해 주는 내 영적 어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무샨 자매님 같은 동역자들은 "이 일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외국으로부터 온 한 편지를 받게 되기까지 결코 아무것으로도 위로 받지 못할 슬픔을 겪었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파고다 앵커리지의 어느 산 정상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묘지에 묻혔습니다. 왕 란주 형제를 포함한 몇 형제들이 그녀의 관을 그녀의 집에서 묘지로 날랐습니다. 그녀의 비문에는 '바버 자매님이 안식하시는 곳'이라고 적혔습니다.

(쉐카이나 카페에서 퍼온글)



Watchman Nee in prison (by Wu Yo-Chi)


워치만 니 2011-03-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839.html
Watchman Nee in prison (by Wu Yo-Chi)


Dear brothers and sisters,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I am from Shanghai, China. My name is Wu Yo-Chi. I turned 68 (2003) this year. I used to be a high school teacher. I was accused of anti-revolutionism in 1960 because I was against "three red flags" and sentenced 7 years. I was jailed in the largest prison in the far east -- Ti Lan Chau Prison in Shanghai.

 

저는 중국 상해에서 왔습니다. 이름은 우요치(Wu Yo-Chi)입니다. 올해(2003년) 68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사였습니다. 저는 모택동 정부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1960년에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혔고 7년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저는극동에서 최고 큰 감옥인, 상해에 있는 티란차오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Brother Nee was arrested in 1952. After that it seemed that this person disappeared from the earth. Nobody knows what happened to him. Praise the Lord. The Lord had mercy on a lowly person like me. He loved me and kept me so that I'd have the chance to tell you all what I know about Watchman Nee in prison.

 

니 형제님은 1952년에 체포되셨습니다. 그후 이 사람은 지구 상에서 사라진듯 했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저같이 비천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사랑하사 보존하셨고 그 결과 감옥에 있었던 워치만 니에 관한 모든 것에 관해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I was with Brother Nee 9 years in total (1963-1972). We were separated for about 2 years in between. Praise the Lord that He eventually brought us back together until 3 days before He was taken by the Lord. There are a lot of testimonies in all these years. Brother Nee is also a human being. Today I'd like to testify this on the human aspect about him.

 

저는 총 9년 동안(1963-1970) 니 형제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중간에 약 2년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하셨고 니 형제님이 주님께 가시기 3일 전까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숱한 간증 거리가 있습니다. 니 형제님 또한 한 인간입니다. 저는 오늘 그분의 인간됨에 관해 간증하고자 합니다.

In 1963, because of some adjustments, I was moved to the same floor, same group and sleep in the same cell with Brother Nee. From then on our relationship would not be break apart.

 

1963년에 몇 가지 조정때문에 저는 니 형제님과 같은 층, 같은 그룹으로 옮겨졌고, 같은 감방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후 우리의 관계는 깨어질 수 없었습니다.

Ti Lan Chau Prison was very big. There were 10 buildings in total. Every building had 5 floors. In every floor there were 90 cells. If you had 3 people per cell, each building would contain more than 1000 inmates. In such a huge prison, among tens of thousands of people, to meet a particular person was not easy. I met Brother Nee in cell number 3 and this was the Lord's sovereignty.

 

티란차우 감옥은 매우 컸습니다. 전체 10개 동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각 건물은 5층 높이입니다. 각 층마다 90개의 감방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감방 하나에 3명이 있으면  각 건물은 천 명 이상의 죄수들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한 큰 감옥에서,

수 천명의 사람들가운데 한 특정인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3호 감방에서 니 형제님을 만났는데,

이것은 주님의 주권이었습니다.


In our cell, there was Uncle Nee, myself, and a 20-year-old guy. He had mental problem and thus could not speak clearly. He could only say "O - O - O...". He was also an anti-revolutionist.

 

우리 감방 안에는 니 삼촌, 저 그리고 20살 먹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정신 이상 증세가 있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우-우-우"라고 소리 낼 수 있었는데 그 역시 반혁명분자였습니다.

Dear saints, I want to tell you: When I got into this cell, I was not friendly to Brother Nee at all. I didn't like him. I was hostile to him. I despised him. I did not want to talk to him. Why? Because back then he was the group leader. In the prison, there were group leaders over inmates. To me all group leaders were flattering the guards.  They were the informants for the government. They moved ahead by taking advantage of others to reduce their own sentences while increasing the sentences of others. On top of that, I wondered why was I in the prison? I didn't steal, I didn't rob, I didn't kill... All I did was just saying something and you wouldn't let me go. So I was afraid of him. I did not want to talk to him. There were 3 inmates in our cell; one had mental problem and couldn't talk, Nee was the other one, and I was the last one. He was writing everyday. If he was not reporting me then who was he reporting? How would I ever want to talk to him? 24 hours a day I didn't say a word with him. He was writing right by the door. Why the door?  Our cell was about 1.5-1.6 meters wide. If I stretched my arms I could touch the walls. It was about 2 meters long. Walls on 3 sides without window. An iron door at the front. There was some light near the door. When Brother Nee was writing anything he sat by the iron door. The meal and water were placed right in front of the door. You don't need to open the door. All we needed to do was to stick out our hand and we could bring them in. He sat by the door so he passed all the stuff to us. I didn't want to talk to him and never thanked him. He did that himself. Our relationship was really bad. 

 

사랑하는 성도님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저는 니 형제님에게 전혀 친근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적대감을 가졌습니다. 그를 경멸했습니다.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것은 그가 그룹 리더였기 때문입니다. 감옥에는 수감자들을 관리하는 그룹 리더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 모두는 간수들에게 아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부 끄나불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량은 점점 증가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형량을 줄이려고 앞장 서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먹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감옥에 있어야 할 이유를 몰랐습니다. 저는 훔치거나 강도질하거나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한 일은 고작 몇마디 말을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두려워 했습니다. 저는 그와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감방에는 3명의 재소자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정신 이상이라 말을 할수 없었고, 니 형제님이 다른 한 사람이고, 그리고 저였습니다. 그는 매일 적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나에 대하여 보고  하지 않았다면 누구를 보고하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제가 그와 대화하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저는 그와 한 마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문 옆에서 쓰고 있었습니다. 왜 문일까요? 우리 감방은 폭이 약 1.5 -1.6미터 정도였습니다. 제가 만일 팔을 뻗으면 벽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길이는 약 2 미터 정도였습니다. 3면이 창이 없는 벽이었습니다. 앞에는 철문이 있었습니다. 문근처에 약간의 불빛이 있었습니다. 니 형제님이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을 때는 철문 옆에 앉았습니다. 배식과 물은 철문 바로 앞에

둡니다. 문을 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손을 뻗어 그것을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문 옆에 앉아 있기 떄문에 니 형제가 모든 물품들을 우리에게 전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할 필요도 없었고 결코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혼자 했습니다. 우리 사이는 아주 나빴습니다.

 

Later something happened by the Lord's arrangement. My only family was my wife. She graduated from the Maritime College in Shanghai and was teaching chemistry in high school. We had one girl. Inmates' families could visit us once a month and send us some stuff. My wife loved me a lot. She visited me every month. I thought she was still teaching out there but actually something happened to her. 

 

나중에 주님의 안배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유일한 가족이라고는 아내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상해에 있는 마리타임 대학을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의 가족들은 한 달에 한번 우리를 방문할 수 있었고 우리에게 물건들을 보냈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매달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녀가 여전히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다.

 
One day, the school principle asked her: "Miss Chou, I heard you husband is a anti-revolutionist and is currently in prison?" She said: "Yes." He said: "You have to divorce him." My wife said: "Why?" He said: "It's the government's policy. Anti-revolutionists' families cannot be people's teachers. Your husband is a anti-revolutionist. His thinking has problem. If you contacted him, how can you teach students? So you must divorce him." My wife said: "When I married him, he was not an anti-revolutionist. He was a boxer. He represented Shanghai for international competition. He became an anti-revolutionist after we married. If I divorce him now and marry someone else, there is no guarantee that the other man would also become an anti-revolutionist in the future.. Then should I divorce him and marry again? Plus we already had a girl and I am young. If I got married again I'll have more children. That will not be good for kids.  Moreover, Wu Yo-Chi was sentenced 7 years. I can wait for him and then continue building socialism. We can still be husband and wife." What she said made perfect sense. The principle couldn't argue with her. But would they give up? Impossible. Soon after, the principle asked her again: "Have you decided on that issue?" She answered: "There is no chance." The principle said: "Then there is no chance from us too. This is the policy. Give us your work permit. You get out of this school if you don't divorce." Back then the situation was entirely different. There was no job once she left the school. She could not do anything by herself. My wife cried her way home. Her future was blank. What can I do? What can I do for a living? What can I do for my daughter? When she got back home she cried holding our daughter and nobody was there to comfort her. 
 
어느날, 교장이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 추 양, 내가 듣기로 당신 남편이 반혁명분자이고 지금 감옥에 있다면서요?" 그녀는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당신는 그와 이혼해야만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 아내는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은 정부 정책입니다. 반혁명분자들의 가족들은 인민의 교사가 될수 없어요. 당신 남편은 반혁명분자입니다. 그의 사상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를 접촉하면, 당신이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당신은 그와 이혼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 아내는 "내가 그와 결혼했을 때, 그는 반혁명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권투선수였습니다.
그는 상해를 대표해서 국제대회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결혼 후에 반혁명분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지금 그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그 사람이 또 나중에 반혁명분자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 때 가서 또 이혼하고 다시 결혼해야 하나요? ..게다가 우리는 이미 딸이 하나 있고 저는 젊습니다. 만일 제가 다시 결혼하면 나는 더 많은 자녀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요치는 7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저는 그를 기다릴 수 있고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남편과 아내일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말한 것은 완벽했습니다. 교장은 더 이상 그녀와 다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포기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조금 지나서, 그 교장이 아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결심을 하셨나요?" 아내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교장은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역시 기회가 없습니다. 이것은 정책입니다. 노동허가증을 반납하세요. 만일 이혼하지 않으려거든 이 학교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녀가 일단 학교를 떠난 후에는 직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수 없었습니다. 나의 아내는 울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수 있나? 무엇을해서 먹고 사나? 딸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나? 아내가 집으로 왔을 때 딸을 붙들고 울었지만 누구 하나 위로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Later when she visited me, she told me everything. I was angry after hearing it. How does that make any sense? I was already accused as an anti-revolutionist without reasons and they wouldn't even let my wife and my daughter go. My wife said: "Today I sold my watch and then came. I don't know what to do in the future." Dear saints, I didn't do any bad things, I was not a Nationalist, nor a spy, nor a land lord. What kind of anti-revolutionist was I? I didn't post a piece of anti-revolution flyer. How am I "anti-"? I didn't understand. But what could I do? My wife cried a lot, but I didn't shed a tear. I grew up under Communist regime and Communists taught me no tears in front of enemy. Today I will not shed a tear. I was not your enemy; I supported you. I was only 12 years old when Communists took over. I even celebrated for the People's Army. But you pushed me to the enemy's side. 5 minute visiting time was soon over. My wife left with the kid. I stood there looking at her and didn't know what to do. I am not sure if she'd divorce me. Suddenly she turned back and shouted: "You take care of yourself!" This shout is still in my ears now and it was heartbreaking. I could not do anything. I can't just run out and fight with them. I can only let them torture us. 
 

나중에 그녀가 내게 면회왔을 때,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전 그것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전 이미 이유없이 반혁명분자로 수감되었고 그들은 제 아내와 딸을 내버려두지도 않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오늘 전 제 시계를 팔고 왔어요.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는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스파이도 아니고 지주도 아닙니다. 저같은 반혁명분자가 어디있습니까? 전 반혁명 전단지 한 장도 붙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제가 반혁명분자입니까? 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뭘 할 수 있습니까? 제 아내는 펑펑 울었지만 전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전 적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가르쳤던 공산주의 정권과 공산주의자들 아래에서 자랐습니다. 오늘 전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전 공산주의의 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 공산주의를 지지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전 12살이었습니다. 전 인민군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저를 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5분의 면회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저의 아내는 아이와 함께 떠났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전 그녀가 저와 이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뒤를 돌아 보며 소리쳤습니다. " 몸조리 잘 하세요!"  지금도 이 소리가 귓가를 맴 돌고 있고 그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전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전 뛰어나갈 수도, 그들과 싸울수도 없었습니다. 전 단지 그들이 우리를 고문하게만 놔둘수 있었습니다.


I was pushed back to my cell by the prison guard. I shed some tears. In our cell there was no desk nor chair nor bed. I was weeping against the wall. Then I found out someone was holding my hand. I knew it was got to be that annoying Uncle Nee. I was angry. He was the most despised person to me. What was he doing holding my hand? I wouldn't even talk to him. I didn't need his sympathy. I was going to shake off his hand. I was a boxer and I was young. He was old and had heart disease. All I needed to do was to shake in order to throw against the door. But, dear saints, it was strange. It was a miracle. I could not lift up my hand. Uncle Nee was not strong, and I tried at least 3 times and just couldn't lift up my hand. And then I heard Uncle Nee said: "Yo-Chi, just cry. It's better crying out loud and you'll feel better." This really moved me. Because the policy in the prison is that you cannot cry out loud. Because all inmates were depressed. If you cry he'd cry and the entire prison would be crying. That's bad for re-education. I thought Uncle Nee would say to me: "Yo-Chi, don't cry. It's wrong to cry. You need to follow the re-education." He was the group leader and should be at the government's side. I really wouldn't think that he'd tell me to cry out. Because of this I started to change my view toward him. Then I started to wail. I didn't care about anything and i was loud. I didn't care even if the prison guard came and beat me and shoot me. My family has been to this point. I don't care if I die. It's strange that the prison guard didn't even come. Later I was entirely exhausted. Uncle Nee gave me towel to clean up and gave me water. From then on I started to talk to him. I told him what happened to me. And i didn't expected how frank he was that he also told me what happened to him and his family. From this day on, we had more and more conversation. He told me he was very busy. He was a Christian. He also told me that his wife loved him very much. His w ife had serious high blood pressure. (140+ /200) over. She might go anytime. It's all the Lord's support and His mercy. He wished his sentence will be fulfilled soon so he could get out and still see his wife. If his sentence was longer and his wife left early, he will never see his wife in this age. His wife is just like wife in loving their husbands. He also told me many other things. He said a Christian will not oppose a county leader, because country leaders were all set by the Lord. He was preaching gospel to me. Then I thought, I know I was innocent; now looks like he's innocent too. He was not against the government but you said he's anti-revolutionist. Isn't he obviously innocent? So I asked him: Do you still believe the Lord? He said: "You don't believe, I believe; you don't see, I see." This is his quote. I still remember. 
 

전 간수에 의해 제 감방에 밀어넣어졌습니다. 전 눈물을 조금 흘렸습니다. 우리 감방에는 책상도, 의자도, 침대도 없었습니다. 저는 벽에 기대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제 손을 잡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건 바로 성가신 니 삼촌이라는 것을 전 알았습니다. 전 화가 났습니다. 그는 제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 손을 잡고 그는 뭘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그에게 말조차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정심 따위는 필요없었습니다. 전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습니다. 저는 복싱선수였고 젊었습니다. 그는 늙었고 심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제가 할 것은 오직 그를 문에 부딪치게 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상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전 제 손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니 삼촌은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 적어도 3번은 시도했으나, 제 손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전 니 삼촌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치, 그냥 우세요. 크게 우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럼 기분도 더 나아질 겁니다." 이것은 정말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감옥 안에서의 정책은 크게 울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수감자들이 우울해져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가 울면 한 사람이 울고, 온 감옥이 울음 바다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교육에 좋지 않았습니다. 전 니 삼촌이 제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치, 울지 말아요. 울면 안됩니다. 당신은 재교육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그룹 리더였고 정부의 편에 있어야 했습니다. 전 정말 그가 제게 소리내어 울라고 말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전 그를 보는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전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전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았고 전 시끄러웠습니다. 심지어 간수들이 와서 저를 때리고 총으로 쏜다고 해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저의 가족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전 제가 죽는다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간수들은 오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전 완전히 지쳤고 니 삼촌은 저에게 눈물을 닦으라고 수건을 주었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전 그와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는 기대 이상으로 솔직하게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이날부터,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게 그가 아주 바빴다고 말했고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내게 그의 아내가 그를 매우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심각한 고혈압(140+/200 이 넘는)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그것은 모두 주님의 붙잡으심과 긍휼이라고, 그는 그의 형기가 빨리 채워지게 되어 나가서 그의 아내를 보기를 바랐습니다. 만약의 그의 형기가 더 길어지면 그의 아내는 일찍 떠나고 그는 그의 아내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단지 남편의 사랑을 받는 아내였습니다. 그는 또한 제게 많은 다른 것들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라의 지도자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지도자들은 모두 주님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게 복음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 생각했습니다. 난 내가 결백한다는 것 안다; 지금 그도 결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정부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는 반혁명분자로 불렸습니다. 그가 명확히 결백하지 않다구요? 그래서 전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주님을 믿습니까? 그는 당신은 믿지 않지만 전 믿습니다; 당신은 보지 않지만 전 봅니다. 이것이 그가 한 말입니다. 전 여전히 기억합니다..

 

24 years ago, one brother visited me and I told him this miracle. I said, I don't understand. Why couldn't I lift up my hand? I was strong, but he just held me like that and I couldn't shake him off. This brother said: You will never be able to lift it up. The Lord will not let you lift it up. Then I understood. I was just a lowly person. The Lord found me. The Lord chose me. I will never be able to life up my hand.

 

24년 전, 한 형제가 제게 면회를 왔고 전 그에게 이 기적을 말해주었습니다. 전 말했습니다. 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내가 손을 들어올릴 수 없었을까? 난 강했지만 그는 단지 내가 그를 뿌리칠 수 없는 것처럼 나를 잡았다. 이 형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결코 손을 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이 손을 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때 전 알게 되었습니다. 전 단지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주께서 저를 찾으셨습니다. 주께서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전 결코 제 손을 치켜올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Now our relationship improved and we talked a lot. The other mental guy became happy too, standing there laughing. He actually said a lot, but I understood not a word, the most 50%. But Uncle Nee understood everything and he translated for me. So we three poorly lived together.
이제 우리의 관계는 향상되었고 서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다른 정신이상자도 행복해 졌고, 그곳에서 서서 웃었습니다. 그는 사실 많이 말했지만 저는 한 글자도 아니고, 거의 50%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니 삼촌은 모든 것을 이해했고 그는 제게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셋은 가난하게 함께 살았습니다.
However, peaceful time didn't last long. One day, the prison guard called Uncle Nee out. It lasted for a long time, even passed lunch. Now we have good relationship so i wrapped up his lunch with a sheet. I wouldn't care in the past and would have just thrown it away. When he came back, he was a bit upset sitting on the floor. I asked him: "What happened?" He said: "They wanted me to give up my belief." I said: "Did you agree?" "No i didn't." He then said: "They wanted me to give up my belief. If I agreed, they'll let me go home." I said: "And you didn't agree?" He said: "I didn't. There were 2 other people. One of them was named Lang. The other one was named Chang. Lang was the president of a major hospital in Shanghai. Chang was a mayor of a province. They both are the prominent ones in Catholic Church." I asked him: "How about those 2?" He said: "They both gave up. You'll know soon." Soon the speakers in the prison turned on. The warden announced: Now we have 2 inmates, through the government's re-eudcation, have changed their thought and will openly give up their past believes and anti-revolution stand. Now they will speak." Lang and Chang then spoke. They firstly blamed themselves and then blamed the Catholic Church, saying Catholic Church is the intelligence agency under imperialism and is anti-revolution. They were deceived, but through the government's re-education they'll openly give up superstition and leave this anti-revolution group and thoroughly repent. They were both crying. After they finished, the warden announced, now under the approval, these 2 get released early. They can go home today. Dear saints, when we heard this, the entire prison was shocked, including me. Uncle Nee was right in front of me, and I was staring at him. You just told me a few days ago that your wife was nice to you and you love each other. Plus your wife was not healthy at all and you miss her so much. Today the People's Government is releasing you. All you needed to do was to say a word that you give up. Just open your mouth and you are going home and you wouldn't do that! What kind of person are you? You believe the Lord to such an extend!  I do not understand you....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길게 가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간수가 니 삼촌을 불러냈습니다. 최후로 긴 시간동안이었습니다, 심지어 점심시간도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좋은 관계를 가져서 전 그의 점심을 보자기로 싸두었습니다. 전 과거는 신경쓰지 않았고 단지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는 바닥에 앉은 채 약간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그들이 제가 저의 믿음을 버리길 원합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동의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는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저의 믿음을 포기하길 원합니다. 만약 제가 동의한다면 그들이 저를 집으로 보내줄 것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동의하지
않으셨나요?" 그는 "네"라고 말했습니다. 그곳에 다른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명의 이름은 랭이었고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은 챙었습니다. 랭은 상하이에 있는 큰 병원의 원장이었고, 챙은 지방의 시장이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카톨릭 교회에서 두드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포기했고, 당신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곧 감옥 스피커가 켜졌습니다. 관리자는 방송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두 수감자가 있습니다. 정부의 재교육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이 바뀌었고 그들은 그들의 과거 신앙과 반혁명 입장을 완전히 버릴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말할 것입니다." 랭과 챙이 그때 말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들 자신은 비난했고 그리고 나서 가톨릭 교회는 제국주의 아래에 있는 정보국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말하면서 가톨릭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속임당했지만 정보의 재교육을 통해서 그들이 완전히 미신을 포기하고 이 반혁명단체에서 떠날 것이고 완전히 뉘우쳤습니다. 그들 둘은 울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끝난 후에 관리인이 이제 승인 하에 이들 둘은 일찍 석방될 것이라고 방송했습니다.  그들은 오늘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이것을 들었을 때, 저를 포함해서 감옥 전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니 삼촌은 바로 제 앞에 있었고 저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단지 제게 몇일 전에 제 아내가 제게 잘 대하고 당신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당신의 아내는 하나도 건강하지 않고 당신은 그녀를 매우 그리워하고요. 오늘 정부는 당신을 해방시켜줄 것입니다. 당신이 할 것은 단지 당신이 포기하겠다고 한 마디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당신의 입을 열고 당신은 집으로 갈 수 있었지만  당신은 그것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은 그 정도로 주님을 믿습니다! 난 당신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Freedom is (precious). But today People's Government is giving Uncle Nee freedom and he doesn't want it. For the Lord Uncle Nee gave up life, love, and even freedom. He loved the Lord and believed the Lord so much. I was really impressed. What the communists did was eroding the soul and really effected Uncle Nee. Since you don't give up, I'll release 2 on your face. But Uncle Nee was not touched. It did not erode his soul. But my soul was eroded.. I knew this person was not dumb or mental. There was a reason that he believe the Lord so much. It's got to be a good thing to believe in Jesus, so I wanted to believe Jesus too, just like Uncle Nee. From then on I felt I had to believe in the Lord. Everybody should believe in the Lord. For redemption you need the Lord. For salvation you need the Lord.
 

자유는 소중합니다. 하지만 오늘 인민 정부는 니 삼촌에게 자유를 주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니 삼촌은 생명과 사랑과 심지어 자유까지 포기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아주 많이 믿습니다. 나는 정말 인상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것은 영혼을 서서히 망치는 것이었고 정말 니 삼촌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포기하지 않은 때부터 나는 나는 당신이 보는 데서 두 명을 석방시킬 것이다. 그러나 니 삼촌은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망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영혼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벙어리나 정신이상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님을  많이 믿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좋은 것임에 틀림없었고 저도 예수를 니 삼촌처럼 믿기 원했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주님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들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구속을 위해 당신은 주님이 필요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당신은 주님이 필요합니다.

 

Some saints asked me, which book did you read from Uncle Nee to turn to the Lord. I said I never read his article to believe the Lord. I didn't believe because I read his article. When I knew him I didn't believe yet. I read his person then I believed the Lord. An Chinese idiom says, education by word is less effective than education by action. I saw his action and was effected and believed. Uncle Nee was a human being. I believed because of my subjective knowing to this person. And this matter deeply influenced me. 

어떤 성도들은 주님께 돌이키기 위해 니 삼촌의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전 주님을 믿기 위해서 그의 책을 결코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그의 간행물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제가 그를 알았을 때 저는 아직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의 인격을 읽었을 때 주님을 믿었습니다. 중국 속담에 말로하는 교육은 행동으로 하는 교육보다 덜 영향력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의 행동을 보았고 영향을 받았고 믿었습니다. 니 삼촌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 사람을 주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깊이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So I was saved in such a way through Uncle Nee. Uncle Nee in the prison never stood up high and lifted his hand and shouted: Friends, you all have to believe! And then thousands believed. Neither did Uncle Nee fight and fight to the end with communists and became a hero in the prison. This is lie. It was not like that. I simply never gave up his belief. We have to tell the truth and I am telling you the truth in Christ.. My conscience is moved by the Holy Spirit and testifying to me.  

 

그래서 저는 니 삼촌을 통해서 그런 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감옥 안에서 니 삼촌은 결코 높이 일어서지 않았고 그의 손을 들고 이렇게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당신 모두는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수천이 믿었습니다. 또는 니 삼촌이 공산주의자들과 끝끝내 싸우고 싸워서 감옥에서 영웅이 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렇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그의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만 하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저의 양심이 성령에 의해 감동받았고 제게 증언합니다.

The second time we met was in Bai-Mao Ling Labor Camp in province of Ann Huey. There we stayed together for another 5 years. When we met we were both impressed.... He was already very weak, old, and could barely walk. Where we lived is about 60-70 meters away from the cafeteria. And we lived at the lower side. Cafeteria was on the upper side near the road. To get good from cafeteria you have to climb over 2 hills and go across the road. To Uncle Nee that was impossible to do. So everyday I'd get 3 meals back to him. One day, the prison guard called me to the office and asked why get food for Watchman Nee everyday. I said: "He's old and weak. No way he can climb over 2 hills. It is right to help him and get food for him." However, the guard turned serious and said: "Nonsense. He pretends being sick. Tell him to get food himself.. You will not do that again." It was clear that they were just giving Uncle Nee trouble, so I didn't even listen to them.
 
우리가 두번 째 만난 것은 안 후에이 지방에 있는 바이마오 링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또 다른 5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 감동받았습니다. 그는 이미 매우 약해져 있었고 늙고 간신히 걸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식당에서 거의 60-70미터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낮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싣당은 도로근처 위 쪽에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뭘 얻으려면  두개의 언덕을 올라가서 길을 건너야 했습니다. 니 삼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는 세 끼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어느날, 간수가 저를 사무실로 불러서 왜 매일 워치만 니에게 음식을 갖다주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는 늙었고 약합니다. 그는  두 개의 언덕을 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를 돕고 그를 위해 음식을 얻어오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간수는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당찮은 소리. 그는 아픈 척하는 것이다. 자기가 음식을 가져 가라고 말하시오. 당신은 다시는 그 짓을 하지 마시오." 그들이 니 삼촌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Few days later I was getting food from the cafeteria. The clerk in the kitchen told me: the guard notified, nobody was allowed to get food for Watchman Nee. He had to come by himself. So I could only go back to my room and told Uncle Nee everything. I knew he was a knowledgeable person. So I told him to do something. I sat right by him and wait for his ideas. After a long time, he finally said: "I would just let it be." I was very surprised. Let it be. Obey to the Lord's arrangement. I was worried and angry. How could he just say that? "Don't you want to eat?" I didn't want to argue with him so I just shared with my my food. At that moment, praise the Lord, the Lord gave a good idea to a dumb person like me: I used to get only 5 grams (Chines measurement) of food. Now I can tell the clerk that I labored a lot today and need one more gram. Cafeteria would suspect that. And I can share with Uncle Nee 2 grams. He's old so that'll be enough for him. I get 4 grams. It was less than usual, but I could survive. Everyday we shared food like this and finally passed through the difficulty.
 
며칠 후에 저는 식당에서 음식을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거기 부엌에 있던 점원이 저를 불러 말했습니다. "간수가 알아차렸습니다, 아무도 워치만 니를 위해서 음식을 얻도록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와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가서 니 삼촌에게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저는 그가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서 그의 생각을 기다렸습니다. 긴 시간 후에 그가 결국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모든 것을 내버려둘 뿐입니다.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순리에 맡겨라. 주권에 복종하라. 나는 걱정했고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먹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그와 말다툼을 하길 원하지 않아서 저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좋은 생각을 저같이 말못하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중국 수치로) 단지 5그램의 음식을 얻어오곤 했습니다. 이제 저는 점원에게 오늘 제가 일을 많이 했으니깐 1그램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식당은 그것을 의심했습니다. 저는 니 삼촌과 함께 2그램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늙어서 그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저는 4그램을 먹었습니다. 평소보단 적지만 버틸만했습니다. 매일 우리는 음식을 이같이 나누었고 결국 어려움을 통과했습니다.
 
One day in 1971, the guard let me bring a letter to Uncle Nee. The letter wrote, his wife Untie Nee fell from the chair and broke 2 ribs. She's currently in emergency room. I told Uncle Nee don't worry and at the same time requested visiting family in Shanghai. I was planning to go with him. Actually, Uncle Nee and myself have both fulfilled our sentence. But in 1966, there was Cultural Revolution in China. None of the prisoners could be released. But the policy said we can visit family once a year and half a month each time. I thought, such a major thing happened at home and we should be allowed to go.

1971년 어느 날, 간수가 저에게 편지 한통을 니 삼촌에게 건네달라고 했습니다. 그 편지에는 그의 아내 니 아주머니가 의자에서 떨어져서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응급실에 있습니다. 저는 니 삼촌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고 동시에 상하이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갈 계획 중이었습니다. 결국 니 삼촌과 저는 둘다 형량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1966년에 중국에 문화혁명이 있었습니다. 수감자들 중 아무도 석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책은 우리가 가족들을 1년에 한번 보름동안 방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 가장 큰 일이 집에 일어났고 우리가 가도록 허락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In the beginning the guard told Uncle Nee that they'll think about it. And then they said you have serious heart disease and could not even walk. How can you go to Shanghai? Uncle Nee told them that I could go with him. So the guard said we'll think about it. We waited for 2 weeks. When we asked the guard again, the guard just gave us serious face and said: "What can you do anyway? You are not a doctor. Plus your wife is doing find now. We know that. We considered your request and we don't approve it." Uncle Nee didn't argue a word. Neither did he let me to argue with them. We just went back to our room together. He prayed silently. Some saw his lips were moving and asked me: "Nee is praying, right?" I said: "No. He's just doing Chi."
Guard asked me also and I said the same thing. But I knew, Uncle Nee didn't stop praying for a day.

 

처음에 간수는 니 삼촌에게 그들이 그것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고 심지어 잘 걷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상하이로 갈 수 있는가? 니 삼촌이 그들에게 내가 그와 함께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그것을 생각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2주동안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다시 간수에게 물었을 때, 간수는 우리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당신이 뭘 할 수나 있소? 당신은 의사도 아니잖소. 게다가 당신의 아내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는 중이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소. 우리는 당신의 요구를 고려했지만 승인하지 않을 것이오." 니 삼촌은 한 마디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그들과 말다툼하는 것도 막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함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제게 물었습니다. "니가 기도 중이지요, 맞죠?" 저는 "아니요. 그는 그저 Chi를 하고 있는 겁니다." 간수도 제게 물었고 저는 똑같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 니 삼촌이 하루종일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Finally on one day, I came back from work and saw Uncle Nee with tears all over his face. Untie Nee passed away. Uncle Nee was very sad. I told him don't be sad and try to request again for the funeral. I thought this time it's got to be approved. But i couldn't believe that after waiting for a long time it was still not approved. The guard said: "She's dead anyway so what can you do to go back?" Dear saints, who has suffered more like this? Uncle Nee's heart was broke. But he wanted the Lord and was firm in the Lord. He bore the whole thing.
...
마침내 어느 날 저는 일에서 돌아왔고, 니 삼촌의 얼굴이 눈물로 가득찬 것을 보았습니다. 니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니 삼촌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슬퍼하지 말고 장례를 위해 다시 요청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승인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랜 시간 후에 그것이 승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간수는 말했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죽었고 그래서 돌아가서 당신이 뭘 할 수 있소?" 사랑하는 성도님들, 누가 이보다 더 고통받았습니까? 니 삼촌의 심장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원했고 주님 안에서 견고했습니다.그는 모든 것을 견뎠습니다.

Uncle Nee love the Lord for his whole life and suffered a great deal. After a few days he was out of the agony. His life was back to normal and persisted to pray everyday.
니 삼촌은 그의 온 일생동안 주님을 사랑했고 큰 일도 고통받았습니다. 며칠 후에 그는 심한 고통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생활은 평소대로 돌아왔고 매일 기도를 지속했습니다.
After 9 months, he was moved to Bai Yun Mountain. That was a countryside of the east of the province.  A patient of heart disease like him said farewell to us, sitting along on a tractor. 3 days later, we heard the news that he passed away.

9달 후에 그는 바이 윤 산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것은 그 지방 동쪽의 변두리였습니다. 그와 같은 심장병 환자는 트랙터 옆에 나란히 앉은 채 우리에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3일 후에 우리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Other than physical suffering, Uncle Nee suffered more psychologically. He suffered all these and gained nothing in his life. But he gained the Lord. Through him we see the Lord. He is a vessel, but there is treasure in this vessel.

신체적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더욱 니 삼촌은 정신적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 고통을 받고 그의 일생에 아무 것도 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얻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그는 그릇이지만 이 그릇 안에 보물이 있습니다.

Today in here we can shout out freely: "Lord, I love you." In China you can also shout "Lord, I love you." But back then under the ruling of extreme left, you can't just do that. Uncle Nee loved the Lord in his whole life, but for 20 years he was under limitation. People wouldn't let him say "Lord I love you." Imagine, if for 20 years you don't get to say "Dear mother, I love you." nor "Dear daughter, I love you." nor "Wife, i love you." Can you bear that? However, Uncle Nee bore all that. Because of this, let us shout 3 times: "Lord, I love you." "Lord, I love you." "Lord, I love you."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자유롭게 외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중국에서 당신은 또한 소리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때 공산치하에서는 우리는 그렇게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니 삼촌은 온 일생동안 주님을 사랑했지만 20년동안 그는 제한 아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20년동안 당신이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혹은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혹은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당신을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니 삼촌은 그 모든 것을 견뎠습니다. 이 때문이 우리는  3번 외칩시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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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용 여사가 감옥에서 지은 시


기도와찬양 2011-03-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827.html

 

사랑은 나의 죄,

그래서 여기 저들이 나를 가둔다네.

이토록 오랜 시간 갇힌 것은

너무나 사랑스런 그분을 위함일세.

 

 

여기 내가 왔을 때처럼

이 거룩한 불꽃이 노예라네. 나는 아직도...

어떻게 더 잘 자랄 수 있으려나?

어떻게 내 가슴으로부터 날아갈 수 있으려나?

나를 가둔 저들, 알아야 할텐데

진정한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 짓밟히고 경멸스럽게 짓이겨진다 해도

사랑은 살아 다시 타오르는 것.

 

 

그럼 나의 탓인가?

그분은 언제나 나의 망막에 아로새겨졌네.

 

 

일단 불꽃이 튕겨져 불씨에 닿으면

그분은 언제나 나의 망막에 아로새겨졌네.

일단 불꽃이 튕겨져 불씨에 닿으면

그분은 언제나 태우며 빛을 내시네.

저들 나를 엄습하고 비난하네. 그 불씨 때문에.

내가 사랑을 멈출 수 없는데

무슨 힘으로 흐리게 하려나,

위로부터 떨어져 타오르는 그 광선을...

 

 

영원한 생명은 결코 스그라들지 않네,

하나님은 사랑의 생명.

만일 생명의 그 근원이 끝난다면

오직 그때만 더이상 빛이 비취지 않으리.

 



Andrew HMurray - 순종의 덕목 아침기도


기도와찬양 2011-03-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826.html

 

순종의 덕목 아침기도                  

   

순종과 아침 기도 사이의  관계는 밀접하고 중요한 것이다
전체적인 순종의 삶을 살려는 바램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아침 기도 시간에 제공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아침 기도만이 우리가 매일 필요로 하는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의 필수이자 의무로서만 기도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짐이 될 것이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생각하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매력적인 기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바라는 단 한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실되고 축복된 삶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 때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좀더 잘알 수 있도록 그분의 은밀한 방으로 우리를 초대하며,

사랑과 힘을 전달받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며 그분의 생명으로 충만한 생명력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영적 생명이 단련을 받고 강하게 되는 것은
은밀한  아침 기도속에서 이다
아침 기도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적인 순종을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싸움터이다

 

만일 우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김으로
아침 시간에 진정 승리한다면, 그 날의 나머지 시간들도 분명히 승리할 것이다

 

실제로 기뻐하고 온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할 것인지를 입증하는

곳은 바로 그 은밀한 방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기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우리가 아는 것이 첫번째 교훈이다


우리의 아침 기도의 목적이 그분의 축복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때 우리는 그것을

 고대하고 그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침 기도 시간은 하나님과 매일 만나기로 작정한 사람의 삶 속에 큰 능력이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아침에 함께 한 시간을 보낸다면 아침기도 시간에

우리에게 임하는 기쁨과 그것을   통해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찾아오는 희열은

 얼마나 클 것 인가!....

 

완전한 순종에 대한 굴복의 정도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의 정도인 것이다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아는 영적 능력이 있을 수 없다
순종이 없이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짐을 아는 확신이나 담대함 그리고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갖고 계신 축복을 보고 주장하며

 간직할 능력이 없다

 

한편 아침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견고하고 살아 있는 영적 교제가 없으면 우리는

순종의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ㅁ
순종의 서약이 능력 안에서 매일 아침 새로워지고 위로부터 확실히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침 기도에서이다

 

순종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행해질 수 있는 것도 아침기도에서이다

하나님의 뜻을 영적으로 알게되는 아침기도!
매일의 아침을 주님께 열어 드리므로 그분과 함께 동행할  
것을 준비하자 !!


그분의 빛과 능력이 흐르므로 ....

 

Andrew HMurray - 순종의 축복 중



기도 - 내 안에 한 인격이 계시된 날


기도와찬양 2011-03-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www.chch.kr/Hannah/26825.html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또하루의 시작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당신의 말씀의 영으로 적셔주시고, 주의 거룩한 본성을

주입받아 당신으로 인하여 살게하소서...

 

 

제가 아침에 먹은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내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함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케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을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하심이라'

 

 

얼마나 감사한지요..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전까지

계속 성령의 거룩케하시는 찾으심에 대하여

많은 스쳐가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어느날 내가 아닌 하나님이 저를 찾으셨습니다...

겨울에 새벽예배를 마치고 부어주심을 따라

많은 회개의 기도를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 안에 누가 계시는 것입니다.

한 인격이 내 안에 만져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가 달라보이고, 하늘이 전과 다르고...

내 마음은 모든 것과 화목이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채워지니,

많은 요구도 없어지고, 만족이 되고,

혼자서도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성령의 초기의 찾는 거룩하심 이후,

진리를 믿음(받음, 연합)으로

나의 존재안으로 하나님의 요소가 분배되어

빛비춤 받을때마다 옛성분은 부끄러움 당하고

그의 거룩한 요소가 제 안에 운행하심을

점점 느끼게 되었지요.

 

 

이제도 점점 하나님의 본성이 주입되는 것만을 관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이 

바로 '분배(dispensation)'인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영광....

 

오늘 아침에 기도할때 주님은 많은 다른 일들보다

그리스도를 살지 않는 것이 '흠과 티'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영광안에 들어가는 것은 흠과 티가 없어야 가능한데

그리스도를 살지 않는 것이 바로...

오 주님 감사합니다.

미쁘신 주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주만을 바라보며, 주와 하나된 삶이 되게하소서...